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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지붕 파실댁

릴레이 수필 제2641번째

김규리 경북대학교 치의과학과 석사과정
▲ 김규리 경북대학교 치의과학과 석사과정

경상남도 창녕군 성산면 가복리. 물귀신 소문이 헛도는 음습한 상가복 소류지를 지나면 당제로 금줄 묶인 500년 묵은 고목나무가 있다. 조금 더 걸어가면 있는 개울가. 그 언덕 위로 있는 파란 지붕의 파실댁. 나는 해가 일찍이 져 사과가 잘 맺힌다는 어느 골짜기 마을의 파실댁을 추억해본다.

이장 글씨가 새겨진 초록 모자며 때 탄 팔토시. 귀에 꽂은 라일락 한 개비. 화훼공판장에서 받아 온 천년초 가시가 뭣 모르고 설쳐대던 손바닥에 박혀있다. 어린아이 앞에서 매캐한 담배를 뻑뻑 피워대던 것 치곤 자상한 손길. 선인장 가시를 뽑아내며 담부터 조심하라 타박하던 주름진 얼굴. 그게 내 첫 기억의 시작이다.

산골에서 읍내까지 이어진 버스는 하루에 두 번 와서 장에 가려거든 차를 타고 족히 30분은 가야 했다. 삼남매는 흰 트럭의 조수석과 보조 조수석을 차지하고 오일장에 갔다. 수확철이면 닭이며 개며 온갖 것들을 파는 장에서는 사과를 팔았다. 일 년 일해서 하루 버는 농사꾼이라는 직업이 좋은 것은 분명했다. 당시 사과 한 콘테나에 2~3만 원 웃도는 시세라 몇 박스 팔면 들어오는 액수가 꽤나 쏠쏠했던 것인지 번 돈으로 중화집에서 간짜장이며 탕수육을 꼭 시켜 먹었다. 돌아가는 길엔 하드까지 꼭 사 먹었다. 또 오일장에서 산 미키마우스 손목시계는 누군가에게 자랑거리가 되었다.

가마솥에 팔팔 끓인 소여물은 키우던 누렁이 두 마리에게 주고 아궁이 남은 잔열에다 고구마나 구워 먹던 것이 떠오른다. 추수철이면 나락 거두다 까끌해진 피부에 약이 단단히 오른 게 생각난다. 대나무 대에 철사 끼워 넣은 양파망으로 잠자리 잡던 것이며, 추어탕 해먹겠다고 봉투째로 담긴 미꾸라지가 팔딱였던 것. 일요일이면 꼭 틀어야 했던 전국 노래자랑과 유통기한이 3년 지난 신라면.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자랐으면서 정작 추억하는 곳은 골짜기 마을의 파실댁이다. 이 모든 기억이 그곳에 머물러있다.

현재, 보라색 줄 미키마우스 시계의 초침은 멈춰있다. 선인장 가시를 뽑아내던 주름진 얼굴은 더 이상 떠오르지 않는다. 라일락의 독한 담배 향은 익숙한데, 내 기억의 시초는 선명한데, 기억 속 인물은 가물가물하다. 잊은 것이 분명하다. 망각하고 말았다.

 

파실댁의 주인들은 죽어서도 함께하려는 건지 딱 1년 단위로 떠났다. 돌아온 여름날 또 겪은 부고. 장례식장에 올라온 가자미식해의 붉은 양념장을 씹어 먹었다. 어느 모 대학병원의 무슨 생선조림의 연한 양념장과는 다르게 유난히도 붉었다. 간이 된 붉은 양념장은 덜 된 것에 비해 맛이 없었다. 이건 환자 주제에 생선살을 발라주던 손이 그리워서다.

 

텁텁한 분향내. 장의차의 적막. 내겐 컸던 상복과 머리핀. 오동나무관이 활활 타고 남은 뼛가루. 가복리 제일 높은 곳. 멧돼지가 나타나 시체를 파먹을지도 모른다며 화장해 유골함 채로 안치해달라는 유언에 따랐다. 파실댁의 주인들은 골짜기 마을 가장 높은 곳에 묻혀있다. 오늘은 내 기억속 파실댁이 유난히도 그리운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