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 익은 핸드피스를 내려놓고 마음 편하게 자판을 두드리니 막상 글발이 더디다. 글발의 발이 디디는 그 발이 아니요, 글발의 본뜻은 ‘글월 또는 문맥’임을 익히 알지만, 말끝에 달린 ‘발’을 꼬투리 삼아 글짓기의 완급에 비유함도 이 또한 글쟁이의 특권이요, 무료함을 달래주는 심심파적(破寂)이다. 마감에 쫓겨 가며 회무(會務)와 진료 틈틈이 원고를 쓸 적에는 조금만 더 여유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했는데, 정작 멍석을 깔아 놓으니 해찰을 부린다던가?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더니, 머릿속이 멍하고 생각이 멈추면 제 몸을 괴롭힌다. 궁지에 몰리면 머리를 쥐어뜯는 기사 조치훈의 심정을 짐작한다. 자해는 자위와도 통한다던가?
젊은이처럼 샌드백을 두들길 수도 없으니 일단 갑갑한 방을 탈출한다. 마련해둔 사랑방이 마침 엑스포 공원 부근의 오피스텔인 덕분에 산책 코스는 차고 넘친다.
‘선택 1호’는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한밭수목원이다.
엑스포 시민광장을 가운데 두고 동서로 나뉘는 한밭수목원은 갑천을 경계로 하여 북쪽은 무지개다리로 이어지는 엑스포 과학 공원과 남으로는 예술의 전당ㆍ시립미술관ㆍ고암미술관ㆍ연정국악원ㆍ평송 청소년문화센터 등 문화예술-콤플렉스의 허파 노릇을 하는 대전시민의 쉼터다.
도로율과 녹지 비율이 높은 대전광역시에서도 빼어나게 청정한 공기를 자랑한다. 시민광장은 이동식 지붕(Moving Shelter) 세 개를 갖춘 거대한 야외 공연 공간으로서 겨울이면 빙상 링크로도 쓴다. 서원(西苑)은 야생화(野生花)원과 단풍나무 굴참나무 상수리나무 등 숲길을 산책로 둘로 묶었고, 동원(東苑)은 목련원ㆍ약용식물원ㆍ암석원ㆍ유실수원을 셋으로 엮었다. 입구 남쪽에 곤충생태관 열대식물원 및 천연기념물센터도 있어 두고두고 살피고 음미해도 항상 새롭다.
현역 시절에는 한 바퀴 돌기에도 늘 시간에 쫓겼지만, 이젠 여유 만만하게 걷는 11만 7천 평(여의도 공원의 1.6배)의 아름다운 공간이다. 연정 국악원은 박물관과 대ㆍ소공연장을 두루 갖춘 국악(國樂)의 메카로 자리 잡 았고, 미술관 앞은 조형물ㆍ조각상이 늘어선 야외 전시장이다. 다시 남으로 정부종합청사와 특허법원ㆍ광역시청 등 넉넉하게 설계된 행정ㆍ사법 관청가(官廳街)가 맞닿아 있다.
갑천을 건너 북으로는 컨벤션센터와 대덕연구단지ㆍ국립중앙과학관ㆍKAISTㆍ충남대학 등이 엑스포과학공원을 에워싸고 있다. 과학ㆍ예술ㆍ문화ㆍ교육시설을 골고루 갖추어 세계가 부러워하는 두뇌와 예술의 ‘만남의 광장’이다.
부모님을 모시면서 버거운 운전기사를 둔 지 어언 30여 년, ‘73년에 딴 운전면허는 장롱면허가 되었다. 개업을 접으며 작은 차를 사서 직접 몰아 보니 차가 사흘이 멀다 하고 찰과상을 입는다. 나야 그렇다고 쳐도 접촉한 상대방은 무슨 죄인가? 민폐 척결 차원에서, 진짜 BMW는 세워두고 다른 BMW(BusㆍMetroㆍWalk)로 바꿨다.
필자야 어차피 반납이 멀지 않은 면허증이지만, 운전경력 40년의 안식구는 차 한 대가 늘어서 외출할 때마다 행복한 고민이다. 천천히 걸으니까 세상이 달라진다.
첫째, 보인다. 씽씽 지나칠 때 놓친 것들이…… 이 발견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넣어야겠다. 둘째, 걸으면 건강에 좋다. 두 코스 이상을 돌면 기본으로 6천보는 걷는다. 셋째로 천천히 걸으면 혈액순환 덕분인지 뇌가 활성화된다. 수목원에는 예쁜 벤치도 많다. 갑자기 생각이 떠오르면 걸터앉아 증발하기 전에 메모를 한다.
막힌 글에 물꼬를 터줄 아이디어라면 대박…… 아리스토텔레스가 학도들과 산책한 까닭을 알 듯하다. 끝으로 이제야 보이는 신기한 꽃과 잎사귀 하며 식물의 이름을 배운다. 이동 수단인 발이 없는 나무에게, 만물의 영장 인간보다 고품질의 DNA를 설계해주신 그분의 뜻도 어렴풋하다.
임철중 치협 전 의장
- 대전 문화예술의 전당 후원회장
- 치문회 회원
- 치협 대의원총회 의장 역임
- 치과의료문화상 수상
- 저서 : 영한시집《짝사랑》, 칼럼집《오늘부터 봄》《거품의 미학》《I.O.U》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