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신안군 장산면 장산도. 들어본 적도, 미디어에서 접한 적도 없던 이름이었다. 지도 어딘가에 조용히 자리 잡고 있던, 나와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섬이었다.
직전 근무지는 같은 신안군의 안좌도였다. 목포에서 대교 4개를 건너야 닿는 연륙도. 섬이긴 했지만 도로가 이어져 있었고 택배도 가능했다. 이삿짐 차량이 들어가지 못하는 일도 없었다. 불편함은 있지만 불가능은 없던 곳. 그래서였을까? 장산도로 향하던 날 나는 ‘배만 타고 들어가면 비슷하겠지’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아주 큰 오산이었다. 이삿짐센터 차량이 섬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그때 처음, ‘들어간다’라는 말의 무게를 실감했다.
그렇게 목포에서 카니발 차량을 빌려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침대, 책상, 컴퓨터, TV 등 큰 짐과 함께 왕복 여러 번의 이사를 시작했다. 하루에 세 번뿐인 배편에 맞춰 차를 실어 날랐고, 섬과 육지를 오가는 이사는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 그렇게 치과의사 한 명, 의사 두 명, 한의사 한 명의 장산도 생활이 시작되었다. 총 네 명이 조용한 섬마을의 유일한 의료인이었다.
장산도에는 병원도, 약국도, 심지어 편의점 하나조차 없었다. 전국 어느 읍내에나 있는 것들이 이곳에는 없었다. 그런데도 처음 만난 주민들의 표정은 예상외로 경계심에 가까웠다. 우리는 그들이 필요해서 왔다기보다, 그저 누군가는 있어야 하니까 어딘가에서 ‘보내진’ 사람들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솔직히 그 마음을 나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어머니를 닮은 환자”
진료실에 앉아 있는 시간은 진료라기보다는 기다림에 가까웠다. 낯선 공간, 낯선 사람들. 내가 이곳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이 마을 사람들이 나를 받아들이길 바란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무리였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하루하루 낯선 진료가 이어지던 어느 날, 내 어머니 또래로 보이는 환자 한 분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어머니와 닮은 곱슬머리와 짧은 단발, 꾸밈없는 옷차림. 나는 늦둥이라 부모님 연세가 꽤 있으신 편인데, 그래서였을까? 그날만큼은 진료실 문 너머의 거리가 유독 가깝게 느껴졌다.
그분은 임플란트 치료를 해보고 싶다 하셨다. 멀리 배를 타고 나가 진료를 받아봤지만, 잇몸뼈가 부족해 수술이 어렵다는 얘기만 들었다 했다. 다른 병원을 권해드리자, “차가 없어서 멀리 움직일 수가 없어요. 선생님은 못 해주시나요?”하고 물으셨다. 말문이 막혔다. 보건지소에는 자재뿐만 아니라 어떠한 X-ray 장비도 없었다. 설명이라도 드리고 싶은 마음에 “혹시 다음에 엑스레이 사진을 휴대폰으로라도 찍어와 주실 수 있을까요?” 여쭈었다. 며칠 뒤, 그분은 오래된 폴더폰을 들고 오셨다. 기대감이 고스란히 담긴 표정으로 흐릿한 사진을 내밀며 웃으셨다. 화질은 좋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냉정한 진단과 치료가 요구되는 직업이지만, 어쩌다 한 번쯤은 가슴이 먼저 반응하는 환자를 만나게 된다. 그분이 내게는 그런 존재였다. 자재와 장비들만 있었다면 한 번쯤 시도해 볼 만한 케이스라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나는 아무것도 해드릴 수 없었다. 감정적 지지 외에는, 그 어떤 치료적 개입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되풀이하며 고개를 숙였지만, 그 상황을 만든 건 내가 아닌데 왜 그렇게 죄송했던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비 오는 날의 방문”
또 한 사람은 30대 중반의 남성 환자였다. 처음엔 연고도 없는 젊은 남성이 왜 이 섬에 혼자 머무는지 의아했다. 주민등록상 주소는 경상남도 창원. 그는 이 섬에서 묵묵히 염전 일을 하며 지내고 있었다. 그분이 보건지소에 방문하는 날은 항상 비가 오는 날이었다. 염전은 비가 오면 쉴 수 있어서, 보건지소를 방문할 수 있는 시간이 그때뿐이라고 했다. 구강건강은 60대 이상으로 보일 만큼 좋지 않았다. 치아도 거의 없었으며, 잇몸 상태도 매우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본인이 겪는 불편함이나 치료에 대해, 그리고 삶에 대하여도 길게 말하지 않았다. 가족 이야기도, 사연도 없었다. 나는 그저 할 수 있는 진료를 이어가며 그의 침묵을 함께 버텨주는 마음으로 시간을 쌓아갔다.
그러다 어느 날, 보건지소가 리모델링에 들어가게 되었고 약 두 달 동안 간이 진료만 가능했던 시기가 있었다. 두 달, 그리고 그 이후에도 그분은 다시 오지 않았다. 검게 그을린 얼굴, 몇 없는 치아로 정중히 건네던 인사, 고향 사투리로 하는 농담에 잠깐 미소를 보이던 그 표정이 지금도 문득문득 떠오른다. 나는 여전히 그에게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젖은 신발로 진료실 문을 열던 그 몇 번의 날들, 그 발걸음이야말로 내가 받은 가장 큰 신뢰였을지도 모르겠다.
“꼬깃꼬깃한 봉투 하나”
내가 이 섬에서 받은 가장 따뜻한 인사는 보건지소 실장님에게서였다. 나는 원래 낯을 많이 가리고 살갑게 다가가는 성격이 아니다. 낯선 일터에서의 관계는 적당한 거리감 속에서 유지되는 게 편하다 믿었고, 장산도에 처음 왔을 때도 그 생각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행히 함께 근무하던 의사, 한의사 선생님들은 밝고 사교적인 분들이었고, 자연스럽게 그 분위기에 나도 조금씩 섞일 수 있었다. 하지만 실장님과는 존중과 예의 사이, 그 어딘가의 어색함이 있었고 편안한 대화까지는 끝내 닿지 못한 채 1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렇게 떠나는 날, 시원섭섭한 마음으로 인사를 나누고 발걸음을 돌리려는 순간, 실장님께서 조용히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봉투 하나를 꺼내 건네주셨다. 그 봉투에는 “선생님, 함께 일할 수 있어서 참 행복했어요. 혹시 결혼 같은 좋은 소식 있으면 꼭 연락주세요. 서울, 부산, 전국 어디든 축하하러 갈게요. 고생 많으셨는데 나가서 좋은 거 사드세요”라는 손 편지가 적혀있었고, 그 봉투에 담겨있던 소중한 용돈. 나는 잠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솔직히, 그 순간만큼은 와락 안아드리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서로에게 깊은 말을 주고받은 적은 없지만, 그 1년의 시간이 마음 한가운데 조용히 그리고 강렬하게 남았다. 그 봉투는 지금도 내가 가장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것 중 하나이다. 혹시 언젠가 다시 장산도로 향하게 된다면, 그 이유는 아마 실장님을 뵈러 가는 길일지도 모르겠다.
전라남도 신안군 장산면 장산도. 그곳에서의 1년은 화려한 진료나 성과로 남은 시간은 아니었다. 진료 환경은 열악했고, 자재와 장비는 늘 부족했으며, 때론 ‘해줄 수 없는 것’을 설명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쏟아야 했다. 하지만 그 시간들은 나에게 의료의 본질이 무엇인지 다시 묻게 했다. 지식과 기술보다 앞서는 태도, ‘환자를 대하는 마음’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자세 말이다. 흔히 말하는 ‘의료 소외지역’에서의 진료는 치료만큼이나 경청, 설득, 기다림이 중요하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게 해주었다. 치료가 없는 날에도 온기는 이어졌고, 그 따스함이 오히려 내게 더 큰 울림으로 남았다.
섬은 늘 조용했고, 나는 그 조용함에 자주 길을 잃었다. 멀리 가지 않아도 집 앞에만 나서면 바람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는 것이 없었다. 그 고요와 적막 속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기억은 힘든 순간마다 다시 진료실로 돌아가야 할 이유를, 그리고 어떤 치과의사로 나아가고 싶은지를 조용히 되짚어주는 나침반이 되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