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벨이 울린다 …
바쁜하루, 오늘은 또 어떤 환자가
나를 울리고 웃길 것인지
이런 환자도 있었다.
얼마전 전공의들이 의약분업 때문에 파업을 하고 진료에 복귀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환자의 보호자가 병원을 옮기고 싶다며 찾아왔다. 자기 이익만 챙기는 의사들에게는 더 이상
진료를 받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사정을 들어보니, 파업 당시에 혼자 환자를 진료하고 있을 내가 무척 바쁠 것을 예상하고
전공의들이 몇몇 환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약속을 미룬 것이 화근이었다.
부득이하게 약속을 미루게 된 것에 대해 사과를 드렸지만, 보호자는 이기적이고 자기 실속만
차리기 위해 환자들은 나 몰라라, 파업까지 마다하지 않는 의사들은 믿지 못하겠다며 치료비
잔액을 환불해달라는 것이었다. 물론 약속을 임의로 미룬 것은 우리가 잘못 한 일이라 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대화 한번도 안 해보고 무조건 병원을 옮겨야 하겠다며 막무가내인 그
보호자가 무척이나 야속했었다.
그 이후 그 환자와의 문제는 원만히 해결되어 지금 열심히 치료받고 있기는 하지만 덕분에
하루종일 우울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나를 속상하게 하는 환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주의가 산만해서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던 환자가 있었다. 치료를 시작할 무렵에는 말도 없던 그 환자는 약 2년 동안 치료를
받는 사이 많이 친한 사이가 되었다. 교정치료를 마친 후 얼마 있지 않아 환자는 군대에
갔는데, 지금도 휴가 때면 어김없이 교정과에 놀러온다. 나는 바빠서 말붙일 틈도 없는데,
군에서 힘들었던 이야기며 자기 아래로 졸병들이 몇 명이라는 둥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워섬기기 바쁘다. 제법 의젓해진 태도로 군대이야기를 해주다가는 군대에서는 너무
심심하다며 위문편지라도 좀 보내달라는 말을 남기고 가곤 한다. 휴가 때마다 나타나서
위문편지 한 통도 안 써준다며 뼈있는 구박(?)을 하는 녀석이지만 그녀석이 나타나면 내심
반갑기 짝이 없다.
이런 환자도 있다.
처음 교정치료를 받기 시작하면서 구강위생상태가 너무 좋지 못해 나에게 여러 차례 야단을
맞았다. 치료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장치를 풀고 충치 치료를 받아야 했다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그런데 내가 양치질 좀 깨끗이 하라며 나무라도 항상 수줍게
웃기만 하던 그 녀석, 어느 날부터인지 노력한 흔적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은 제법 깨끗한
입 속을 자랑하는 그 녀석, 말없이 내 말을 잘 따라주는 그녀석이 나는 너무 귀엽고
예쁘기만 하다.
병원에 올 때마다 “선생님 미워요!”를 외치며 알사탕 한 개씩 또는 초콜릿 한 개씩을
쥐어주고 가는 여고생 민희, 애교 만점의 목소리로 “장치를 쓰면 아파서 싫어요!”를 외치며
턱모자를 쓰기 싫다고 투정하는 수헌이, 한시간씩 기다리게 해도 “바쁘면 그럴 수도
있죠”하는 너그러운 윤정이, 친구랑 찍은 스티커 사진을 내 수첩에 붙여주던 송이,
“교정치료가 아무리 오래 걸려도 선생님만 보면 힘이 나네요”라며 밝게 웃던 환자, 모두가
나의 보물들이다.
전화벨이 울린다. 약속 환자가 왔다는 전화인 것이 틀림없겠지!
바쁜 하루, 오늘은 또 어떤 환자가 나를 울리고 웃길 것인지. 잠시 빠져들었던 휴식 같은
생각을 접으며 이제 그만 일어서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