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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레이수필(779)>
내 생에 앞에 놓여진 꽃다발
신형건(평택시 푸른치과의원 원장)

나는 밥을 먹으면서도, 길을 가면서도, 잠자리에 누워서도, 심지어는 화장실에 앉아서도 온통 시만을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시인이 되는 길은 뜻밖에도 너무나 빨리 내 앞에 열렸다. 최근에 나는 ‘푸른책들’에서 <거인들이 사는 나라>라는 동시집을 펴냈다. 나는 요즈음 이 책을 꺼내어 들고는 물끄러미 표지를 쳐다보거나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겨보는 습관이 생겼다. 마치 오랜 추억이 깃든 사진이 가득한 앨범을 들춰보듯 이 책을 어루만지는데엔 그만한 사연이 숨어 있다. 나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많은 꿈을 꾸었다. 화가, 고고학자, 건축설계사, 영문학자…… 그 꿈들은 하도 여러 가지여서 다 생각나진 않지만 그 중에서도 시인이 되고 싶다는 것이 가장 간절한 꿈이었던 것 같다. 요즈음에도 나는 치과의사이거나 시인이 아닌 다른 무엇이 되고 싶다는 꿈을 끊임없이 꾸곤 한다. 하지만 좋은 시를 쓰는 진정한 시인이 되고 싶다는 꿈이 여전히 내 가슴 속에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나는 시인이 되려면 대학에 가서 문학을 공부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즈음에 나는 오랫동안 내 꿈에 걸쳐져 있던 사닥다리를 내려야만 했다. 나는 내 삶의 미래가 거쳐야 할 몇 가지 현실적인 고민들에 시달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결국 나는 문과에서 이과로 과감히 전환하여 이듬해에 치과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맞은 대학 생활은 내 마음의 다른 한 쪽을 아쉬움으로 물들였다. 나는 치과의사가 되는 길에 접어들면서 어쩌면 시인이 되는 길을 영영 놓쳐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바심이 났던 것이다. 더구나 고등학교를 마감하면서 신춘문예에 투고한 작품들이 최종심에 올랐다가 아쉽게 고배를 마신 터여서 그 조바심은 더욱 커졌다. 그래서 나는 혼자서 열심히 공부를 했다. 나는 학교에서 치의학을 공부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시간을 시를 읽고 쓰는 일로 채웠다. 물론 학교 생활을 충실히 하는 것도 늘 잊지 않았지만 나는 밥을 먹으면서도, 길을 가면서도, 잠자리에 누워서도, 심지어는 화장실에 앉아서도 온통 시만을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시인이 되는 길은 뜻밖에도 너무나 빨리 내 앞에 열렸다. 예과 1학년 여름에 나는 문예지의 신인문학상에 당선되어 마침내 시인의 길로 접어들었던 것이다. 당선을 알리는 전보를 받아 들었을 때 힘차게 고동치던 내 가슴의 두근거림이 아직도 생생히 남아 있는 듯하다. 그 후 나는 대학을 다니는 6년 동안 열병을 앓듯 시를 쓰고, 쓰고 또 썼다. 그러나 나의 대학생활은 결코 행복하지 못했다. 허약한 몸은 자주 아팠고, 동아리에 속해 있으면서도 늘 겉돌았으며, 진로를 바꾼 후유증으로 공부에 적응하는 기간이 늦었다. 숱하게 유급되고 휴학하는 동기들의 모습이 마치 내 자신의 모습 같았으며, 당시 약학대학에 다니다 자퇴한 누나를 보며 심한 가슴앓이를 했다. 그것은 아마도 극심한 우울증에 가까운 자기연민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우울하고 쓸쓸했던 시절을 밝혀준 것은 오직 시의 램프뿐이었다. 시를 읽고 쓰는 행위는 유일하게 내 가슴을 따듯하게 만들고 어두운 내 생활을 환하게 해 주었다. 본과 4학년 가을에 나는 6년 동안 쓴 시들을 모아 출판사에 보냈고 그 원고는 마침내 한권의 시집이 되어 이 세상에 태어났다. 국가고시가 끝나고 열흘 뒤에 나온 그 시집은 내 생애의 새로운 출발점 앞에 놓여진 한아름의 꽃다발이었다. 그 시집이 바로 <거인들이 사는 나라>였다. ‘얼른 어른이 되고 싶은 아이들과 다시 아이가 되고 싶은 어른들에게’라는 부제를 단 그 시집은 내게 대한민국문학상 신인상이라는 영예를 안겨주었고 1만부 이상 판매되는 성과를 올려 내가 지금까지 줄곧 시를 쓸 수 있는 힘이 되었다. 그 당시에는 성인을 위한 시집으로 펴내었는데 그 이후에 쓴 시들을 보태어 똑같은 제목의 동시집으로 이번에 다시 펴내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동시집 <거인들이 사는 나라>는 내 인생의 가장 어두우면서도 가장 환한 갈피인 셈이다. 지금은 과거의 장으로 넘어갔지만 언제든 꺼내어 놓을 수 있는 현재의 장이기도 하다. 지금 내가 치과에 앉아 직업에 충실한 치과의사로서 일하고 있으며 또 미래에도 좋은 시를 쓸 수 있다면 그것은 또 미래의 한 페이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꼭 10년 전에 내 생애 앞에 놓여졌던 꽃다발을 들어 다시금 전혀 시들지 않은 향기를 맡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들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