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급강하에 마치 시골길을 완행버스타고 가는 것처럼 요동하는 가운데 내 옆에 탄
공인회계사가 한마디 거든다. "어! 이러다 떨어지는 거 아냐?"
이제 제법 날씨가 쌀쌀하다. 흐르는 세월은 어쩔 수가 없나보다. 새 천년이라고 떠들던 때가
엊그제 같더니 벌써 한해를 마무리해야하는 결실의 계절인 것이다. 해외라곤 제주도를 가본
것이 전부였던 내가 미국을 다녀오기로 마음먹은 것은 어쩌면 인생의 황혼기를 맞이하기
전에, 평범한 개업의로서 젖어있는 나태에서 헤집고 나오기 어려운 시기에 이르기 전에, 뭔가
새로운 도전을 받고 싶은 욕심이 있어서였다. 그렇다고 무조건 떠난 것은 아니다.
공항터미널에서 수속을 밟을 때까지만 해도 내가 과연 미국을 다녀올 수 있을까? 가이드도
없이 혼자 몸으로 비행기를 갈아타고 원하는 목적지까지 갈 수 있을까? 내 자신에게 "넌 할
수 있어!" 라고 체면을 걸어보기도 하고... 그러는 사이 이미 비행기는 2만 피트를 넘어
솟아오르고 있었다. 여행을 가는 사람, 출장을 가는 사람, 겉으로 보아 목적지를 알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커다란 보잉 747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면세점에서 담배 2보루 이상은 안된다고 했는데 10보루를 사서(미국에 교환교수로 와 계신
교수님의 특별한 부탁이 있었기에) 가방에 마치 블록을 쌓듯이 밀어 넣은 게 마음에 걸린다.
그러나 그 생각도 잠시, 눈을 감고 내가 가서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해야만 했다. 한국 땅에서
익힌 영어가 무척 고생(?)도 하겠지 그 곳 병원장과 인터뷰 할 일도 막막하고 우선 당장
시카고 공항에서 4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하는 일도 막막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미국 중부쯤
다다른 상공에서 비행기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두 세번 급강하에 마치 시골길을 완행버스
타고 가는 것처럼 요동하는 가운데 내 옆에 탄 공인회계사가 한마디 거든다. "어! 이러다
떨어지는 거 아냐?" 시카고 공항에 내리기 전에 불시착이라도 하면 다음 비행기는 어떻게
타나? 고민하는 가운데 다시 순항하는 비행기... 정갈한 기내식이 나오면서 기내는 모두
통일된 행동을 한다. 별로 선택의 여지가 없는 공간, 식사, 도중에 내릴 수도 갈아탈 수도
없는 공동의 운명 같은 것을 생각하면서 음식을 밀어 넣었다.
드디어 시카고 공항에 도착하고 무사히 담배를 가지고 들어온 것에 안심할 겨를도 없이
커다란 공항 규모에 기가 죽었다. U.A. line에서 예약 확인을 하고 모노레일을 타고 한참이나
되는 곳으로 가고서도 또 한참을 걸어가서야 미국 국내선 게이트를 찾을 수 있었다.
입국수속을 하고 국내선 비행기 탑승구까지 오고 나니 이제 2시간 남짓 시간이 남았다. 카펫
문화! 온통 카펫이 깔려있는 것을 미국을 빠져 나오는 순간까지 느껴야만 했다. 의문대명사를
적절히 넣은 콩글리쉬를 하여 미국 땅에서 다음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는 내가 대견스러워
커피도 사먹어 보고 책도 사봤다. 그래도 시간이 남아 옆에 앉아 계신 할머니에게 말도
걸어보았다. 캐나다에서 오신 할머니는 외손자를 보기 위해 딸 집을 가시는 길이었다.
할머니와 이별(?)을 하고 게이트를 빠져나와 비행기에 오르자 크나큰 대한항공과는 달리
불과 100여석 밖에 되지 않는 오래된 비행기에 놀랬다. 4명의 스튜디어스가 안내하고 그중
한명이 비행기 출입문을 닫자 비행기는 굉음을 내며 뉴욕 로체스터를 향했다. 짭짤한
비스킷과 콜라를 받아 하나인 iri호를 바라보며 잠깐 졸았다. 긴장이 풀린 탓일까? 로체스터
공항엔 마중나온 교수님이 있다는 생각이 평안을 주었나보다. 드디어 아담하지만 전통의
도시 로체스터에 발을 디뎠다. 그러나 공항의 크기에 놀라고 한참을 걸어나온 후에야 마중
나온 교수님을 뵐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