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똥 떨어진 곳
마음에 두었다.
다음 날 가보려
벼르다. 벼르다.
이젠 다 자랐소”
고요함이 흐르는 밤이다. 이렇게 적막이 흐르는 밤이면 가끔씩 상념에 젖어보는 시간이 있다. 거기에 환한 보름달이면 지나간 추억이 짙게 뭍어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은 둥근 달은 보이지 않고 가슴 저리고 쓰라린 가련한 달, 그믐달이 나의 맘을 아프게 한다.
그렇다. 객창 한등에 정든 임 그리워 잠 못 들어 하는 분이나, 못 견디게 쓰린 가슴을 움켜잡은 무슨 한 있는 사람이 아니면 그 달을 보아주는 이가 별로 없을 것이라고 나도향은 그믐달을 그렇게 표현하질 않았는가?
가장 정 있는 사람이 보는 동시에 가장 한 있는 사람이 보아주는 그믐달을 보며 정말이지 나도 만일 여자로 태어날 수 있다면 그믐달 같은 여자로 태어나고 싶은 심정이다.
돌이켜 보면 아득하다. 나도 모르게 어느새 참 먼 길을 왔다는 생각이 든다. 그 누구를 아무리 불러도 메아리만 되돌아오는 지난날을 혼자말로 스스로를 다그치며 그렇게 걸어 왔나보다. 프로는 아니지만 한 홀 한 홀 골프공의 인생처럼 남들은 파를 잡으며 아니 버디를 잡으며 인생의 전반홀을 도는 시점에 난 보기에 더블보기 심지어 트리플 보기를 범하며 인생의 긴 여정을 돌고 있는 지금이다.
내 등뒤엔 언제나 쉬어갈 수 있는 커다란 그늘 집이 한 채 서 있다. 인생의 여정에서 지치고 외로울 때면 이곳에 머물러 기대어 앉기도 했다. 그저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보는 것이 전부였지만, 그렇게 기댈 수 있는 든든한 곳이 있어 나는 행복했고 힘이 됐던 것 같다.
몸이 좋지 않아 늘 약대에 진학을 권유했던 부모님 몰래 그저 낭만이 있고 맑은 수채화가 좋아서 화가지망생이었던 20여 년 전 고등학교시절 처음 본 그녀는 같이 그림을 좋아하는 아직 어린 중학생 한 송이의 코스모스였다.
화려하지도 않고 달콤한 향기를 뿌리지도 않으면서도 그저 바람이 불면 긴 목을 휘청이듯 흔들리면서도 늘 그곳에 서 있는 한 폭의 수채화처럼, 맑고 깨끗한 그런 꽃이라 생각했다. 미술전시회가 있을 땐 나의 작품에 꽃 한 송이 놓아주던 어린 소녀.
그림이란 화제로 그렇게 고교를 졸업하면서 결국 난 화가지망생의 꿈을 포기하고 보건계열 전문학교에 입학했다. 그래도 코스모스를 닮은 어린 소녀와는 그 시절 동네 이장댁에 한 대의 전화뿐인지라 편지 연락만이 오로지 우리의 연락 방법이었다. 소녀는 고등학생이 됐고 입시라는 문제가 대화의 어두운 장이 됐지만 풀잎내음을 풍길 줄 아는 학생이었다.
졸업하면 오빠와 커피숍에 함께 가고 싶다던 그녀는 어른들의 삶의 여유에 대해 동경했었고 난 그에게서 지난날의 추억과 낭만을 그리고 활기에 찬 자신을 찾으려 했다.날마다 난 낙서장에 낙서를 했다. 멀고 먼 훗날엔 지금 못 다한 말들을 할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장래 무엇을 전공할까? 를 고민 할 땐 맑고 깨끗함이 좋아서, 간호사 혹은 초등학교 교사를 추천했고 그녀의 적성도 시골 부모님의 경제적 사정도 모두 맞아서인지 예비교사가 됐고 난 짧은 대학생활에 아쉬움과 허전함에 또 다른 목표로 늘 고민했던 때이다.
그리고 공학도의 꿈을 키울 때 그녀는 대학생활에 흥미를 가졌는지 그해를 마무리하는 연하장에 ‘내년엔 사랑 많이많이 하세요’를 끝으로 가끔씩 연락이 오곤 했다. 후에 안 일이지만 자신을 사랑해달라는 뜻을 난 몰랐던게다.
꽉 찬 보름달이 뜨고 주위에 수많은 별들이 수놓을 때 끝없는 숭배를 받은 여왕과도 같은 그녀의 달을 보며 얼마나 많이 별을 헤아렸던가? 그에겐 차라리 아무말없음이 깊은 헤아림을 주겠거니 생각하며 서쪽하늘로 떨어지는 하나의 별똥별을 찾으려 얼마나 헤메었던가?
그후 보건계열의 전문학교가 인연이 돼 공학도에서 치과의사란 의료인 돼 병원을 개업하며 쉴새없이 세상을 쫓기며 살아오면서 늘 그녀의 둥근달을 보며 힘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