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에 오르자마자
얼른 신발과 양말을 벗어 제쳤고
얼음을 떼 내고자 애를 써 보았다
정토사 앞마당에는 놓여진 차 한대 없고 수북하게 흰 눈만 쌓여 있었다. 기분 좋게 대웅전을 바라보다가 왼쪽 편으로 솜씨 좋게 차를 갖다대고는 여느 때처럼 Sack을 꺼내 둘러맸다. 과연, 아직 아무도 올라간 사람이 없었단 말인가... 처녀지라고나 할까 자욱하나 없는 눈길 위를 조금씩 걸어 나갔다. 밝게 동트는 아침햇살이 깨끗한 눈 결정체마다에 반사되어 오히려 따갑더니, 잊고 있었던 초등학교시절 모래 반짝이가 발라진 크리스마스카드가 생각나더라. 초등 1년 적, 예쁜 여자급우 새총으로 쏴서 울렸던 기억,
우리 집으로 찾아와서 마구 화를 내시던 그 엄마가 생각나고, 학교근처 탱자나무 울타리의 미감아 고아원과 그 사납던 원생출신의 거친 아이들, 검정 콜탈로 도색이 된 판자 교사 벽 앞에 무채색의 옷들을 입고는 죽 늘어서 햇볕을 쪼이던 상급반 아이들 무리가 한 눈에 보이는 듯하다가 오히려 약간의 어지러움을 느껴져 왔다. 오늘 날씨 유난히 춥기는 하지만 무척이나 화창하고 하늘은 너무나 시퍼렇다.
작은 포장도로 하나를 건너기만 하면 바로 입산인데 가만히 보아하니 내 앞길에 발자국이 두 사람 것이더라. 하나는 올라가는데 다른 하나는 내려오는 자국이다. 그러면 그렇지 오늘 아침 내가 처음일수야 있겠는가… 약수터 조금 못 미쳐 검정색 옷을 입은 사나이 한사람을 만나게 됐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예, 만사형통하시고 길 조심하세요...
어깨를 죽 펴고 허리를 반듯하게 한 다음 물 한 모금을 마셨고 솟아오르는 태양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람세스 2세를 생각해 냈다. 크리스티앙자크의 소설 속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파라오... 그의 어린시절 이야기... 태양과 황소... 아, 그러나 내일부터 시작되는 새해는 원숭이 해이다.
돌고 돈다는 12지... 초등학교 6학년 시절, 본과 4년, 그리고 태평양을 건너 미국유학까지... 어느 틈에 세 바퀴를 돌았는가했더니 또 다시 순식간에 한 바퀴를 더 돌고 말았어.
여기서부터 앞길을 인도해 주던 발자국은 전부 사라져버렸다. 좀 전에 만났던 그 사람도 약수터까지 아마도 사랑하고 아끼는 식구들을 위해 물을 길러 왔었구나. 영하 15도 일기예보를 접하고 집을 나서면서부터 떨면서 출발을 하였더니, 계속해서 열심히 걷고는 있으되 오늘따라 땀이 푹 배어나는 느낌이 전혀 없다.
눈 속에 발이 빠지더니 정강이까지 무릎까지 거푸 빠지고... 발가락 마다 그 끝이 아프고 이제는 발뒤꿈치 아려오고 둔통, 꽤 느껴지는 고통 그 정도가 심해졌다. 눈 많은 산길에서는 익스플로러스패치가 필요한데 목장갑하나만을 달랑 가졌고, 걸을수록 자꾸만 눈이 발목과 신발 사이 틈으로 끼어들더니 체온으로 반쯤 녹다가 찬 기온에 곧 얼어버리는 모양이다. 맞은편으로부터 옅은 고동색 차림의 남자 한사람이 다가온다. 도대체 몇 시에 산행을 시작했기에... 무슨 남모를 걱정이 있거나 아니라면 특별히 자신의 건강을 위해... 다행히 이 사람은 내가 오르고자하는 길을 통하여 내려오고 있었다.
혼자 신이 나서 한참 즐겁게 오르다가 잠깐 그 자리에 섰다. 앞길 인도하던 발자국은 오른쪽으로 굽이를 틀었는데 아마도 매바위 쪽으로부터 하산을 했던가 보다. 가는 길이 다르니 그대로 따라 갈 수 없고 결국, 자주 다니던 길인데도 방향을 전혀 잃고 말았다. 이리저리 왔다 갔다 몇 번을 살피다가 그냥 하늘을 올려보며 무작정 오르기로 했다. 우거진 나무들 높은 가지로부터 눈 덩어리 마구 쏟아지고 양쪽다리는 교대로 허벅지까지 빠져들었다.
아침에 자꾸만 따라나서는 귀여운 타미를 데리고 왔더라면 얼어 죽이고 말았을 것이다. 행여 강아지가 없어지기라도 한다면 반드시 대들고 따지고 어쩔 줄을 몰라 하겠지만, 어느 날 갑자기 제 남편, 제 아비가 사라진다 하더라도 태연함을 그대로 유지하며 잘 살 것만 같은 것이 요즈음의 우리네 가족이다. 다시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