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오고 비오고 춥고 덥다고
우리의 삶이 쉬거나 멈추는 것이
아닌 것처럼 산을 걷는 일도…
무의산행창밖을 보니 일기예보대로 가랑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준비했던 등산복을 비옷으로 바꿔 입었다.
주섬주섬 간식거리를 챙기고 커피를 내려 보온병에 담는다. 평소에도 커피를 즐겨 마시지만 쌀쌀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초가을부터는 언제나 등산길에 빼 놓을 수 없는 필수품이 엷게 내려 보온병에 담은 원두커피다. 한참 땀 흘린 뒤 산속에서 맡는 정겨운 커피향에 중독이 됐다면 과장이겠지만, 보온병의 뚜껑을 손이 곱아 열수 없을 정도로 무섭도록 추운 겨울날 바람에 날리는 눈보라를 등지고 손을 떨며 간신히 따라 마신 커피가 목을 타고 내릴 때 느껴지는 뜨거운 뭉클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구름 한점 없이 파란하늘, 등산객도 드물어 사방이 온통 눈과 얼음뿐인 산의 정상에서, 사정없이 몰아치는 칼바람을 맞으며 마시던 커피는 나를 왜 그토록 서럽게 했던지.
오늘은 간단한 산행이 될 것 같다. 50중반이 넘은 나이에 뉴욕으로 유학을 떠나시는 등반대장을 환송하는 모임이라 간단한 산행 뒤 식사를 하게 돼 있기 때문이다.
약속시간에 맞춰 도착한 영종도기념관 주차장에는 빗속에도 벌써 산우회원들이 도착해 산행전의 가벼운 소란스러움과 흥겨움을 엮어내고 있다.
산우회에 가입한지가 얼마 되지 않아 낯선 얼굴이 많아서 조금은 어색한데 고등학교 선배이신 A선배가 반갑게 맞아주신다. A선배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 할 때 난 알지 못 할 여유로움과 푸근함을 느끼곤 한다. 아주 오래된 사이처럼, 마음속에 있는 어떤 것들도 그 앞에 털어놓고 싶은 유혹 같은 것. 오늘도 나를 보자마자 자판기 앞으로 데려가 커피잔을 손에 쥐어 줘서는 기어이 내 마음을 느긋하게 만들어 놓고야만다.
오늘은 산에서 무슨 이야기를 그와 나누게 될까? 어쩌면 한마디의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산을 걷는 일은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은 아니니까.
잠나루 선착장에서 무의도행 배를 탄다. 배라지만 버스와 승용차가 수십대 실리는 페리선이다. 인천시 중구라는 안내약도를 보며 서운한 마음이 든다. 군, 면, 리가 제격인 지명에 왜 자꾸 사람들은 시, 구, 동을 붙여놓는지 모를 일이다.
안내판 앞에 서서 인간의 제어할 수 없는 욕망과 끝없는 수컷의 번식본능 같은 것을 그 이유로 꼽아보며 무의도, 그 옆의 작은섬 실미도, 앞으로 오르게 될 호룡곡산과 국사봉을 건성건성 눈으로 짚어본다. 페리선은 으르렁거리는 엔진소리와 함께 우리를 잠깐사이에 무의도 선착장에 데려다 놓는다.
선착장에 내려 우물거리는 사이에 일행을 놓치고 말았다. 결국은 A형님과 걷는 호젓한 산행이 됐구나. 이리저리 길을 물으며 걷는다는 것이 국사봉은 건너뛰고 호룡곡산만을 오르게 됐다. 해발 244미터, 바로 해수면부터 오르는 것을 감안한다면 여느 곳의 한 400미터나 될까하는 나즈막한 산이다. 젊은 외국인남녀 여남은 명이 비를 맞으며 하산을 하고 있었다. 좀 풍만한 - 사실은 뚱뚱한 - 외국여성이 길이 미끄러워 넘어질 뻔 했는지 가벼운 비명을 지르다가 자신도 우스워 나를 바라보며 원숭이 같은 소리를 냈다고 깔깔거린다. 예쁜 원숭이라고 진반 농반의 인사를 하고 고맙다는 답례를 듣는다. 가랑비는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처럼 끈질기게 내리고 있다. 겨울산행 다음으로 좋아하는 것이 가랑비 맞으며 하는 산행이다.
날은 스산하고 을씨년스러운데 비옷을 입고 우산을 써도 몸은 어쩔 수 없이 비와 땀에 젖어 축축하다. 멈추어 있으면 오싹한 한기가 돌아 계속 걷는다. 청승맞기까지 하다. 평범하지는 않은 것일까? 산에는 나같은 류의 사람들이 많다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는다. 어차피 산행은 날씨와는 무관하기도 하다. 눈오고 비오고 춥고 덥다고 우리의 삶이 쉬거나 멈추는 것이 아닌 것처럼 산을 걷는 일도 그러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산은 비를 가리는 것보다 늘어진 나뭇가지들을 헤치며 길을 만드는데 편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