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으로도 간음하지 말라는
성인군자 수준의 극우까지
스펙트럼이 만만치 않다는…
수없이 지고 뜨는 트렌드 사이에서 불륜은 이제 일시적인 유행이 아니라 우리세대를 특징짓는 하나의 문화현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꾸준한 관심을 일으키고 있다. 아마도 몇 년 전 유동근, 황신혜 두 배우가 주연했던 ‘애인’이라는 드라마 이후로 이 문제가 수면위로 떠오른 것 같은데 엽기적인 소재가 난무하는 요즘 미니시리즈 쪽에서 본다면 유치한 정도에 불과했을테지만 그 당시에는 꽤 반향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요즘 이성의 상대방을 부르는 호칭을 보면 영어의 영향력이 정말 대단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 때만 해도 친구는 동성친구를, 여자친구나 남자친구는 아직 이성의 감정이 개입돼 있지 않은 이성친구를 지칭하고 애인이나 연인은 연애대상인 이성을 지칭했었는데 요즘은 우리 때의 애인이 여자친구나 남자친구로, 이성 감정이 배제된 친구는 그냥 친구로, 애인이라 함은 거의 유부남 유부녀들의 비합법적인 이성친구를 의미하는 것으로 그 의미가 바뀐 듯 싶다.
이는 그냥 세월이 지나 감에 따라 그 의미가 변한 듯도 싶지만 다시 보면 영어의 한역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다. 친구는 friend의, 이성의 감정이 내포된 남자친구나 여자친구는 boy-friend나 girl-friend의 번역에 불과하고 약간 저속한 느낌은 있으나 퇴폐적인 뜻은 전혀 갖지 않았던 애인이라는 단어에서(마누라가 아내보다는 덜 세련될지는 몰라도 꼭 그 단어를 써야만 할 때가 있듯이 연인보다 애인이라는 말이 갖는 그 나름의 친근감도 있었던 것 같다) lover라고 발음할 때의 그 느끼한 어감이 배어 나오게 된 건 미국이라는 나라가 갖는 그 수퍼파워와 관련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주인 집 눈치를 항상 봐야만 하는 행랑채 아범의 지나친 자기비하일지도 모르지만 여하튼 불과 한세대도 안되는 시기에 그 단어가 갖는 의미가 이렇게 변한 걸 보는 건 별로 유쾌한 기분이 아니긴 하다.
그건 그렇고 불륜이라는 주제로 돌아와 얘기를 계속하자. 그 사전적 정의는 차치하고 불륜이라함은 유부남 유부녀가 합법적 배우자외 이성과의 육체적 관계를 갖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정신적 불륜이라는 말은 있어도 육체적 불륜이라는 말은 없는 걸 보면 불륜에 있어서 육체적 관계는 필요충분조건은 아닐지라도 최소한의 구비요건은 되는 듯 싶다.
그런데 불륜이라는 것이 요즈음 점잖은 분들이 모두 한입으로 얘기하듯이 우리 사회의 윤리의 타락을 대변하고 가족의 존엄성이 깨지는 것의 비난을 감수해야되는 것인가 하는 문제에는 조금 더 생각을 하게 한다.
우리가 양성동물로서 단성생식을 포기하고 양성생식을 하게 된 건 중고등학교 생물 시간에 열심히 외웠듯이 다양한 유전자를 조합해 격변하는 자연환경에서도 살아남으라는 조물주의 뜻일 것이다. 그렇다면 혼인서약에서와 같이 배우자에 대한 정절을 지켜 자기 유전자를 한명의 배우자와 공유하는 것 보다는 보다 다양한 이성과 공유하여 자손을 퍼트리는 것이 보다 조물주의 뜻에 가까울지도 모를 것이다.
물론 사유재산제와 가부장제가 확립된 이후 생긴 거의 모든 근대종교에서 남의 아내를 탐하는 것이 창조주의 뜻과 어긋나며 인륜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애기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육체적인 면을 제외한 정신적인 면을 한번 살펴보자(불륜을 다룬다는 점에서는 좀 적절치 못한 듯 싶지만).
처녀총각의 만남에 못지않게 불륜도 꽤 고차원적인 만남이라는 것이다 처녀 총각의 만남에선 아무리 플라토닉이 어쩌고 그대의 순결한 영혼이 저쩌고 해도 그속에 상대방을 이용해 자기 유전자의 반을 후세에 남기고야 말겠다는 저열한 의도가 항상 숨겨져 있다고 볼 수 있지만 대부분의 불륜 관계에서는 그런 동물적인 의도를 찾기는 힘들 것이다. 자고로 사랑이란 자기희생을 승화시킨다는 점에서 숭고하다고 생각하는 면이 없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