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은 못속이는지
치과 간판이 눈에 들어 왔다.
자동차로 올라온 일반 관광객은 30분밖에 시간이 없어 사진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우리
일행은 여유롭게 이런저런 모습으로 천지의 모습을 어떻게 그대로 담아갈까 고민하며 개인의
역사에 남을 사진을 찍었다.
우리일행의 단장인 김원익(인천 현대칼라 대표)선배는 탁월한 사진기술과 장비로
파노라마사진, 어안사진 등 여러모양의 사진으로 일행의 모습을 멋지고 의미있게 담아내
주셨다. 한시간쯤 벅찬 마음으로 구경을 하고 내려오려는데 멀리서 구름이 다가오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천지를 덮치는 것이었다. 듣던대로, 우린 맑은 천지를 보았지만 그때 막
올라오는 관광객은 구름덮인 백두산과 천지만 보고 가게 된 것이다. 죽을 때까지 다시 못
볼지도 모르는 천지와 만주벌판의 모습을 머릿속에, 눈의 망막세포에 사진찍듯이 각인시키며
내려왔다.
다음날, 장백폭포로 해서 백두산 천지까지 등산을 하려고 갔더니 등산로가 폐쇄되었다고
했다. 백두산 구경에 더없이 훌륭한 코스인데, 낙석으로 인한 관광객의 사망사고로 인한
것이라고 했다. 백두산은 자연생태계가 온전하게 보존된 지역으로 1980년 유네스코에 의해
‘백두산 국제 자연 보호구’로 지정되었다. 제일 높은 봉은 2750m의 북한쪽 백두봉이다.
천지 주변엔 16개의 봉우리로 둘러싸여 있는데 중국측에 6개, 북한쪽에 7개가 있고 나머지
3개는 경계선에 있다.
미인송, 주목, 들메나무같은 희귀한 나무와 산삼, 영지 등 한약재가 번식하고 있으며 높이에
따라 사계절의 모습을 한번에 볼수 있는 독특한 생태환경과 풍부한 산림자원을 가지고 있다.
단군왕검이 나라를 세웠다는 백두산을 뒤로하고 자전거로 산문, 이도백하를 거쳐 송강,
동정으로 해서 만보에 도착했다.
우리의 60년대 농촌풍경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우마차, 자전거가 지나다녔고 소똥, 말똥에
자전거가 미끄러질 뻔하기도 했다. 만보는 조선족 민속촌이 있는 곳이다. 조선족식당에서
우리가 가져간 라면 한상자를 내놓고 인민폐50원(우리돈7천원)을 주고 김치와 함께 라면으로
식사를 했다.
조선족이라 그런지 아주 반가와 했고 헤어질 땐 섭섭해했다. 우린 라면 남은 것, 소주,
양념거리등을 주고 왔다.
안도를 거쳐 연길시에 들어서니 연변 조선족 자치구의 수도답게 35만 인구의 60%가
조선족이었다. 한국관광객이 많아서인지 노래방과 한국음식점도 눈에 많이 띠었다.
교통질서는 거의 무질서에 가까워 자동차, 자전거, 소달구지, 사람이 교통신호를 무시한 채
한데 뒤엉켜 있었다.
그 속에서 다행히 우린 연길시 공안(경찰)의 에스코트로 숙소인 연변 대우호텔까지 무사히(?)
갈 수 있었다. 숙소에서 TV를 켜니 연변TV에서 한글방송을 하고 있어서 놀라움과 반가움이
교차했다. 저녁에 시내로 나가보니 업소마다 한글 간판이 명기되어 있었다. 직업은 못
속이는지 치과 간판이 눈에 들어 왔다. 여기는 우리와 달리 ‘김박사 구강과’ 혹은
‘황선생 구강과’같은 식으로 표기했다. 가이드 말로는 치과 장비와 재료는 우리에 비해서
아주 낙후되어 있으나 치료비나 보철료는 우리의 10분의 1 수준이며 환자도 꽤 많다고 했다.
여기서 개원해도 되겠다 싶었으나 환자수 10배 이상을 보아야 한다 생각하니 몸이 남아 나지
않을 것 같아 그만 두었다(물론 개원도 불가능 하겠지만). 저녁식사를 한 해당화식당은
중국과 북한의 합작음식점인데 북한에서 파견된 직원들이 종업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아가씨’하면 쳐다보지도 않고 ‘복무원동무’해야만 대답을 했는데 모두 수준급의 미모와
춤, 노래 솜씨도 대단해서 식사 후엔 조를 짜서 북한노래와 춤을 특유의 억양을 살려 보여
주었는데 북한공작원이란 얘기도 있어서 조금 꺼림칙했다.
음식값은 우리 기준으론 무척 쌌고, 가족과 친구에게 줄 선물을 사려고 보니 농산물은 아주
저렴했고 다른 기념품들은 품질이 거칠었다. 차와 담배도 조선족아주머니에게 구입했다.
‘이왕이면 같은 민족의 것을 팔아주어야지.’ 하는 마음이었다.
한국인 관광객을 상대로 많은 조선족 상인들이 호객행위를 했는데 장뇌, 산삼이라고 팔며
처음에는 “한뿌리 10만원”하다가 “모이세요, 갑시다.”하면 반값으로 내려가고, 버스에
시동을 걸면 다시 반값으로 내려갔다. 그 후로 물건을 사려다가 깍아주지 않으면 단장님은
“차 시동 걸어요!” 해서 한바탕 웃었다.
다음날 도문시에 가보니 정말 북한의 남양시가 지척에 보였다. 저렇게 보는 것도 남의 땅에
와서나 가능한가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북한에서 강을 건너온 꽃제비아이들이 “큰아바이,
배고픈데 밥값 좀 주시라요.”하며 쫓아다녔다.
측은한 마음에 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