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과도 같은 강진에서
황금과 같은 세월을 보냈고
많은 것을 받으며 살았음을…
강진!
한국에서 가장 한국적이고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나의문화유적답사기’에서 유홍준 교수가 일컬었던 한국의 최남단의 땅.
광주에서 대학을 나온 동창들이 서울이나 외국으로 나간 경우가 보통이었거늘, 난 반대로 남편을 따라 생면부지인 시골로 내려간 것이 금년에 17년쯤 됐다.
LA처럼 전 세계의 인종이 모여 사는 곳도 아니요 서울처럼 화려한 곳은 아니지만, 까마득한 세월을 이 강진에서 보내는 것을 아직껏 후회해본 적이 없다.
세상이 말로 표현하기에 부족할 정도로 급변하고 있지만, 이곳은 아직도 느린 소처럼 예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는 남도의 여유로움과 넉넉함이 남아 있어 좋다. 치료가 끝나면 홍시나 바지락 같은 해산물을 갖다 주는 형제와 같은 환자들을 대할 수 있어 마음이 훈훈해짐을 느낄 수 있다.
이곳에서 고등학교를 6번씩이나 졸업할 정도로 긴 세월을 무난히 보낼 수 있었던 이유는 남편의 고향이기도하지만 지금은 나에게 어머니의 품속같은 평온함마저 주는 강진의 아름다움인데, 오늘 이 지면을 통해 자랑하고 싶은 충동을 면하기 어렵다.
한국이 3면이 바다인 반도이듯 강진은 바다와 강과 산에 에워 쌓인 참으로 빼어난 지형을 갖고 있는데, 관광객으로 그냥 지나치면 잘 알 수가 없고 강진읍 우두봉을 올라가보면 탐진강이 흘러 남도의 바다로 유입되는 전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는데 전국 어느 읍을 간다고 해도 가슴이 철렁거리는 이런 감흥을 얻기는 쉽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강진의 월출산이 세찬 북풍을 완화시키면서 사시사철 따뜻한 날씨로 그리 높지 않은 작은 산과 들판에 흐르는 구강포와 끝없이 펼쳐지는 청정한 남도의 바다를 한눈에 안을 수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학문의 저수지라 불리우는 조선이 낳은 위대한 학자 다산 정약용 선생이 18년 동안 유배하면서 대부분의 저술을 마칠 수 있었던 이유도 이러한 아름다운 경관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빗나간 얘기지만 다산의 형인 정약종은 200여 년 전 천주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 지금이야 성경에 관한 책이 홍수를 이루고 있지만 그 당시 쪽 복음 밖에 없었을 터인데 중요한 교리를 이해하고 있는 수준이 지금 읽어봐도 놀라울 정도의 책을 발간한 신앙인이기도 했는데 결국 순교를 당하게 되는 참으로 빛나는 형제들이다.
다산초당을 가기 전 백련사라는 사찰을 볼 수 있는데 아마 내가 다녀본 절중에서는 단연 으뜸의 경관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 멋스럽게 어우러진 울창한 천연 동백 숲, 다산초당으로 이어지는 오솔길, 제주까지 보일 듯한 남도의 바다를 여기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북에 소월이 있다면 남에는 단연 영랑이 있다고 말을 한다. 흔히 전남을 예향이라고 하지만 그냥 낭송해보아도 가슴에 와 닿는 영랑의 시어는 참으로 우리의 가슴을 미화시키기에 충분하다. 영랑의 시처럼 모란은 여기 강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데 문화재로 지정된 그분의 생가에서 쉽게 그 모란을 배경으로 사진을 담아갈 수 있다.
이 한정된 지면이 자랑하기엔 너무 부족해 너무 아쉬운데 빼 놀 수 없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고려청자의 대부분이 강진산이라는 사실이다. 500년 동안 이곳에서 국보를 생산했는데 지금도 전국에서 유일한 관요로 고려시대의 작품을 거의 재현하고 있는 도요지가 있어 한 두 점 소장한다면 좋은 투자가 되리라 생각된다.
이 곳의 음식, 특히 한정식은 빼 놀 수 없는 일품이다. 다 소개할 수는 없지만 혹시 하멜표류기로 유명한 강진의 병영면 설성식당에 가면 강진의 한정식을 맛볼 수 있는데 특히 양념이 잘된 돼지구이는 별미가 될 것이다. 아울러 하멜이 살던 연유로 네덜란드와 자매결연이 맺어져 있고 옛 성을 볼 수 있는 일거양득이 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몇 년 전부터는 얘들 교육 때문에 1시간 거리인 광주에서 출퇴근을 하고 있는데 오늘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