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보다도 고마운 점은 1년간을 서로 같이 지내면서 아이들이
무척 밝아졌다는 것이다
“이모~. 이사가.”
“이사? 이사가 뭐야?”
“응. 다른 집으로 가는거야.”
“우리 모두?”
“아니, 이모랑, 이모부랑, 큰 오빠, 작은 오빠만 가.”
“그럼 나는?”
세돌이 갓 지난 작은 딸 아이와 내 여동생과의 대화다. 여덟명을 한 식구라고 생각한 작은 아이는 같이 살던 작은 이모가 이사간다는 것이 납득이 가지않는 듯 여러번 되묻고는 같이 가자고 졸라댄다.
부여에서 개원을 하고 생활은 논산에서 하다가, 대전으로 이사온지 벌써 1년여가 지났다.
결혼을 한후 연년생으로 딸 둘이 태어났다. 큰아이는 시어머니께서 돌까지 키워 주셨고, 작은 아이는 친정 어머니가 키우시다가 백일 이후로는 아르바이트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키우게 되었다.
그런데 작은 딸아이가 10개월쯤 되었을 때이다. 집에 온 손님이 둘째 아이의 눈이 이상하다고 하였다. 내사시가 생겨있던 것이었다. 나중에야 원시 때문에 생기는 조절성 내사시라는 것을 알았지만, 당시에는 이 아이가 부모의 따뜻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남의 손에 커서 그런가하고 많은 죄책감을 갖기도 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내 아이를 내가 직접 돌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었고, 결국 이제나 저제나 하던 병원 이전을 하기로 결정하게 되었다. 남편의 직장이 대전에 있는 관계로 자연스럽게 대전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이들의 양육 문제가 역시 숙제로 남아 있었다. 다행히도 바로 밑 여동생 부부가 선뜻 아이들의 양육을 도와 주기로 하여, 어른들의 불편을 감수하기로 하고 아이들을 위해 한 아파트에서 한지붕 두 가족의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두 개의 방은 여동생네가, 나머지 두개는 우리가 쓰기로 하였다. 사실 우리 아파트단지에는 언니네도 살고 남동생 부부도 같이 산다. 요즘 세상에 흔한 일이 아니어서 그런지 다들 호기심 반 부러움 반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혹자는 불편할 거라고 생각할런지는 모르지만, 형제들이 한 아파트에 옹기종기 모여서 살게되니 참 좋은 점도 많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같이 사는 오빠가 생겼으며 놀이동무가 두 명이나 더 생긴 것이다. 처음에는 서로 별것도 아닌 것 때문에 말다툼을 하곤 하더니, 시간이 지나면서 나름대로 서열이 잡히고 역할 분담이 생기는 것이었다. 마치 4남매를 키우는 것 같았다.
큰 아이가 작은 아이를 돌보아주고 동생들이 싸우면 큰 아이가 처리를 하고, 유치원도 같은 곳을 다니게 되었는데, 서로를 돌보아주고 양보하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이고, 각자 자기 물건을 스스로 잘 챙길줄도 알게 되었고 어른들에게 인사도 아주 잘 한다.
무엇보다도 고마운 점은 1년간을 서로 같이 지내면서 아이들이 무척 밝아졌다는 것이다. 가끔씩 싸우기도 하지만 항상 웃음이 끊이지 않고 즐겁게 지내니, 밥도 잘 먹고 튼튼해 진 것 같아 항상 감사하게 생각한다. 더불어 우리 어른들의 생활도 즐거워지고 처음에 우려했던 것과 달리 서로에게 보람된 한 해가 되었다.
올해에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는 동생의 첫째 아이 때문에 우리는 한 지붕 두가족 생활을 마감하고 동생네가 근처의 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겨울다운 강추위도 있었고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는데도 스키장은 아니더라도 가까운 눈 썰매장도 함께 가지 못한 아쉬움은 있지만, 같이 지냈던 지난 1년간이 서로에게 더욱 깊은 정과 신뢰를 느끼게 해준 시간이어서 고맙고, 우리 아이들에게는 사촌들끼리 같은 집에서 살면서 깊은 우애를 다지게 된 것 같아 더욱 고맙다.
우리 아이들이 좀 더 크게 되면, 우리가 같이 생활한 지난 1년여가 마음이 따뜻하고 정 많은 아이로 클 수 있었던 밑거름이 됐다는 것을 알 것이고 그 시절을 무척이나 그리워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