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이 두셋씩 있어도
온갖 장비를 동원해
대량으로 컨닝을 해대는…
일 때문에 건너갔던 가고시마의 한 모퉁이 호텔에서, 나는 우연찮게 일본 뉴스를 통해 흘러나오는 한국의 대입 수능 시험 비리 보도를 보게 되었다. 시험 시간 내내 애타게 기도하는 어머니들의 모습과 시험에 열중하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 굴비두름처럼 줄줄이 끌려가는, 점퍼를 뒤집어쓴 학생들의 모습이 연이어 클로즈업되며 앳된 여자 앵커는 그 특유의 하이 소프라노로 대대적이고도 조직적인 한국의 국가시험 커닝 사건을 흐름도까지 그려가며 상세히 보도했다. 이게 웬 망신살?! ... 한국에 돌아와서도 뉴스시간이면 반복되는 수능 비리 사건 수사보도를 볼 때마다 그 일본 앵커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웅웅거려 나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며칠 전, 남편은 연합뉴스의 기사를 훑어보다 이것 좀 보라며 내게 손짓을 했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수능 비리 때문인지 ‘무감독 시험은 양심을 키우는 교육’, ‘32년간 무감독 시험 치르는 여고’의 제목 아래 개교이래부터 무감독 시험을 고집해온 10여개 고등학교에 대한 기사가 올라와 있었다. 낯설지 않은 문구들... 나는 자연스레 고교시절의 기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걸어가도 15분이면 갈 유서 깊은 명문여고를 코앞에 두고, 그 지역 첫 고교 평준화의 주인공이었던 나는 버스를 타고도 30여분을 가야하는, 이제 겨우 터를 잡은 사립여학교에 배정되었다. 넓은 벌판에 뎅그러니 서 있던 학교 건물, 모래바람이 윙윙대던 그 교정에 처음 들어선 순간의 당혹감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렇게 출발한 고교시절을 불혹의 나이에 들어선 내가 생애 가장 행복했던 추억 한 토막으로 기억하게 될 줄을 누가 알았을까.
황량하게만 느꼈던 첫인상과는 달리 젊고 실력 있는 선생님들이 대거 채용된 학교는 항상 활기가 넘쳤다. 펭귄 할아버지란 별명을 가졌던 교장 선생님은 널리 알려진 문인이셔서 우리는 그분이 작사하신 ‘석굴암’이란 가곡을 교가와 함께 배웠고, 저서 한 두권 쯤은 갖고 계시던 국어 선생님들 덕택인지 문예반 친구들은 대학가의 백일장을 휩쓸다시피 했다. 학원과외가 전면 금지된 때라 우리는 새벽부터 밤까지 학교에 붙잡혀 있어야 했는데, 개교 이래 처음 생긴 한반 뿐인 이과반, 한순간 맘을 놓으면 이삼십 등씩 등수가 뒤바뀌던 고 3시절에, 지금보다 훨씬 더 무거웠던 내신성적의 스트레스 속에서도, 청소시간 그 짧은 20분 동안에 당번이 아닌 사람들은 체육관, 도서관으로 흩어져 뛰고 구르거나 책을 읽을 여유를 가졌었다.
내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란 대작을 완독했던 것도 그때의 그 청소시간이었고, 학예회, 체육대회, 책걸이, 누구 생일, 누구 수상 기념, 심지어는 여름 말복...틈만 나면 선생님들의 주머니를 털게 하던 오만 가지 파티며, 미술실 귀퉁이에서 몰래 한 만화사냥까지...우리는 그 와중에도 정말 나름대로 여유롭고 낭만적인 학창시절을 보낸 것 같다. 눈을 감으면 설경속에 자리잡은 교실, 미술실, 체육관, 생활관, 음악실이 한폭 그림처럼 떠오르고, 한여름 폭우가 쏟아져 정강이까지 물에 잠긴 운동장을 바지를 걷어부치고 단짝친구와 한 우산속에서 재잘거리며 걸어보던 기억도 오래된 영화의 한 장면처럼 정겹게 떠오른다. 눈을 뭉쳐 한 양동이씩 감춰두었다가 교실로 들어서는 선생님께 눈 세례를 퍼붓던 일, 선생님들이 불발이 된 눈폭탄을 집어 다시 우리를 공격하느라 온 교실이 엉망이 되고, 것도 모자라 교무실까지 눈덩이로 쑥밭을 만들었다가, 무서운 교감선생님께 혼쭐이 나고서야 겨우 장난을 멈추었던 일..꼬리에 꼬리를 무는 추억이 지금은 모두 아련한 그리움이다. 그 장난꾸러기 여고 동창들은 지금도 종종 모이고 연락하지만 징글스럽게도 많이 했던 공부의 기억보단 밉지 않은 장난으로 선생님들을 곤란하게 했던 그 기억이 언제나 더 풍요로운 얘깃거리다.
그렇게 행복한 사춘기를 보내게 해준 내 모교가 연합뉴스의 바로 그 ‘32년 무감독 시험’학교다. 입학 때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