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아이들에게 사랑을 주고
스탭들과 사랑으로 만나고
환자들과는 아픔을 들여다보는…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우연히 어느 TV 드라마에서 여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을 붙들고 울면서 소리치며 토해 내는 사랑고백을 본 적이 있다. 그 장면의 전후 이야기를 정확히 알지 못해서 왜 그랬는지 궁금하긴 하지만, 생각해 볼 수 있는 여러 사랑고백의 장면과는 사뭇 달랐던 그 장면이 가끔은 머릿속을 맴돈다.
그 옛날 한 때, 대학시절 나름대로 아름다운 사랑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나도, 그렇게 울면서 애절하게 고백을 한 적은 없다. 그리고 물론 그런 고백을 받아본 적도...헤어져 돌아서면 또 보고 싶어 전화해 불러냈던 사랑도 분명 소중하고도 행복한 나의 추억이긴 하지만 그렇게 애절하진 않았다. 애절하지 않았던 걸 보면 우리는 사랑할 때 그런 아픈 사연이 없어서였을까?
살아가면서 사랑을 한다는 것 또 그 사랑을 내가 살아있는 의미로 되새겨보는 것조차 입에 올리기에 조금은 생뚱맞게 느껴지는 나이가 되었다. 가끔은 소설이나 무대를 통해 만나는 중년의 사랑이야기로 잠시 흥분하기도 하지만, 이제는 그 뜨겁던 사랑도 가정이라는 소중한 쉼터를 받치는 버팀목으로 점잖게 앉아있는 느낌이다. 그래서 사랑은 받는 것 보다 주는 것이 더 의미가 있으며, 조건없이 사랑을 주며 살다간 사람들의 존재가치에 더 주목하는, 제법 이성적으로 사랑을 바라보는 쪽에서 나를 만나게 된다.
이 날까지 많은 사랑을 받으며 살아온 것이 분명히 느껴지지만, 왠지 주는 사랑을 더 느끼는 오늘이다. 우리가 주는 사랑... 가장으로서 아내와 아이들에게 사랑을 주고, 병원에서는 스탭들과 사랑으로 만나고, 환자들과는 그들의 아픔을 들여다보는 의사가 되도록 노력하면서 만나고, 사회에서는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요구들에 기꺼이 응하고, 무료보철이나 저소득층 아동 치아 홈 메우기 등의 사업이나 장애인이나 불우이웃 진료에 동참하면서, 그 사랑의 양은 어떻게 평가될지는 몰라도 그래도 사랑을 주며 살아가는 중년이 되어 있음은 분명한 것 같다.
사랑의 주고받음에 관하여, 물 잔으로 설명하셨던 어느 목사님의 말씀이 생각이 난다. 내 잔이 차고 넘칠 때 그 넘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주위를 적시게 된다는 설명이셨다. 와인 잔을 들고 앉아 한참을 본다. 채워지는 와인인지 내가 와인을 그 잔 속에서 만들어내고 있는 것인지….
‘인공눈물’, 안과를 찾아본 사람들은 대개 ‘인공눈물’을 처방받는 것 같다. 일하는 환경들이 좋지 않아 생각 보다 안구건조증이 아주 많고 그로인한 합병증 또한 많다고 들었다. 안과에서 처방해준 ‘인공눈물’을 한 방울씩 점안을 하면서도 또 다른 나를 바라보게 된다. 울어 본 적이 언제지? 슬퍼서 울어 본 것도 잘 생각이 나질 않지만, 정말 고맙고 좋아서 울어 본 기억은 있다 해도 어색하다. 그래서 매 말라 딱딱한 내 마음을 행복한 사랑의 눈물로 푹 적시고, 내 안의 외로운 나를 위로하고 싶은 때가 많았었다.
그랬던 내가 행복하다.
내가 내 몸속에서 만들어내던 사랑들, 그 바닥이 말라버려 그 두레박질이 힘들 때, 나를 향한 진한 사랑의 고백이 몹시도 그리웠을 때, 이때까지 경험하지 못한 행복한 포옹으로 새 힘을 얻는다. 내 귓전에 울려주시는 그 진한 사랑의 고백, ‘내가 너를 사랑한다.’ 불혹의 나이에 무릎 꿇고 앉아 하염없이 울면서 행복해 한다. 매일 새벽 조용히 십자가 앞에 나아가 나를 향한 사랑의 고백을 듣노라면, 나의 부족한 모습들 이기적인 모습들 다 바라보게 되고, 내 B형 혈액형 핑계대고 고치지 못한 것, 내 자란 환경 핑계대고 우겨대던 것들을 가지고 간절히 기도한다. 나를 고쳐주소서... 그 사랑의 힘으로 내가 살아있었구나... 그래서 철학자들은 애써 에로스와 아가페 사랑을 구분하고 비교하지 못하게 한 모양이다.
그 사랑으로 아내를 향해 아들을 향해, 그리고 주변의 모두에게 보드라운 사랑을 다시 뿜어낸다. ‘사랑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