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간 교정을 하며 정이 들어
부모님 만류에도 불구하고
치대를 선택했는데 내 인생…
3년전 대한치과의사협회 부회장으로 출마하여 프로필 사진을 찍었다.
난생 처음 얼굴 화장을 하고, 스튜디오에서 사진사의 지시에 따라 웃는 표정, 생각하는 표정 등등의 여러 표정을 지으며 수십장의 사진을 찍었다.
결국 그 중에 모든 이를 드러낸 활짝 웃는 모습의 사진을 선택하여 사용하였는데, 그 사진 속의 가지런한 나의 치아를 보며 35여년 전을 회상하며, 나와 치과와의 인연을 생각해 본다.
1969년 고등학교 시절 사춘기에 우연히 거울을 보니 나의 치열이 엉망인 것을 알았다.
앞이 4개가 서로 겹쳐서 들쑥 날쑥한 것이 영 보기가 좋지가 않았는데, 형제들은 드라큐라라고 놀렸다.
보다 못한 어머님이 치열 교정을 시켜준다며 나를 동네 치과로 데려갔다.
여러 군데 치과를 방문하였지만, 그 시대에 한국에 치열 교정을 하는 치과는 거의 없었는데, 어느 치과에 가니 소공동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을 소개해 주었다.
소공동 서울치대를 찾아가니 허름한 까운을 입은 원내생이 찌그덕 거리는 어두운 마루 복도를 지나 고물, 치과 유니트가 2∼3개 있는 구석진 방으로 우리를 안내하였는데, 그 곳이 서울치대 교정과였다.
첫 인상부터 어두 침침한 치과대학과 교정과가 맘에 들지 않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어 진료예약을 하였는데, 치과대학이 원남동으로 이사가니 몇 달 기다리란다.
몇 달후 새로 이사간 원담동의 치과대학 교정과를 가보니, 현대식 건물의 2층, 남향의 전망 좋은 방에 수십대의 신형 치과 유니트를 지닌 치과 교정과를 보고 조금 마음이 좋아졌다.
그후 2년간 수십 차례의 조퇴를 해가며 조희원, 임철중, 김중기, 남동석 교수 4명의 손을 거쳐, 치열 교정을 한 결과 현재의 가지런한 치아를 지니게 되었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고등학교 선배인 이재봉 교수의 권유로 치과대학에 입학했다.
그 당시 내 성적이 좋았는지 고등학교 담임은 서울공대나 의대를 가지, 왜 치대를 가냐고 말렸지만, 2년간 교정을 하며 치과에 정이 들었는지 부모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치대를 선택하였는데,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이라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물론 그 당시에 치과가 이렇게 발전하고, 치과대학이 현재처럼 인기있는 대학이 될지는 아무도 몰랐고, 나 역시 아무것도 모르고 한 선택이었다.
내가 치과대학 31회인데 6년 후배인 37회는 치과대학 입학성적이 의대보다 높아, 치과인의 긍지를 높여주었다.
어쨌든 개업의로서 20년 동안 근무하며 관악구치과의사회에서 회무를 열심히 하다보니, 서울시관악구치과의사회 회장도 하고,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보존과에서 대학원도 수료하여 박사학위도 받아, 서울치대 보존과 외래교수로 근무도 하였고, 현재 대한치과의사협회 부회장으로서 치과계를 위하여 일하며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동창회 부회장까지 되었으니 재주없고, 모자라고, 부족한 나로서는 가문의 영광이라 생각하고 있다.
이 모두가 치과 교정이 인연이 되어, 치과대학에 입학하고 치과의사가 된 것이 나의 복이라 생각하며, 앞으로도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준 치과대학과 전체 치과계를 위하여 보은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봉사할 생각이다.
끝으로 내가 1970년 교정치료를 할 때 나의 교정 모델 번호가 425번인데, 내가 학교 다닐때는 교정과 앞의 모델장에 나의 못생겼던 치아모습이 있었는데 지금은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김 재 영
·77년 서울치대 졸
·현) 치협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