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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레이수필(798)>
추억의 만찬
장주혜(강원도 강릉시 서울치과의원 원장)

어느 날, 아버지가 씩 웃으시며 예의 구락부에서 가져오신 누런 종이 봉투를 내미셨다. 안에는 두꺼운 고기와 피클, 양파가 끼워진 진짜 햄버거가 들어 있었고 그 날은 우리 아버지가 영화배우보다 더 멋지게 보이던 날이었다. 미군 구락부라는 곳이 있었다. 여느 비행장이 있는 곳에는 미군들이 주둔해 있었고 그들의 문화에 부합되게 꾸며 놓은 요식장소 같은 곳으로 기억한다. 보통 사적인 출입은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었지만 남쪽의 어느 도시 변두리에 있는 공군비행장에서 유년기를 보냈던 나는 가끔씩 거길 가볼 기회가 있었다. 보통 우리 남매들이나 엄마의 생일날이었던 것 같다. 그 곳의 육중한 출입문을 열고 들어서면 예의 향신료인지 방향제인지 모를 냄새가 코를 스쳤고 바닥에는 두터운 카펫이 깔려 있었다. 붉은 보가 깔려 있는 둥근 식탁에는 번쩍번쩍 윤이 나는 양식기가 놓여 있었는데 어린 우리가 자유자재로 사용하기에는 버거운 것들이었다. 어른들 두 뼘 높이는 될 것만 같은 높다란 유리컵에 담겨 있는 밝은 밤색의 음료에는 커다란 얼음조각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부탁하면 언제라도 와서 또 따라주곤 했지만, 늘 설탕을 끝도없이 흘려 넣으며 그 떫은 맛을 희석시켜 보려했던 우리가 한 잔을 온전히 마셔 본 적은 없었다. 매번 눈이 휘둥그레지는 우리들을 앉히면서 아버지는 의기양양하셨고 늘상 기분이 좋으셨다. 우리는 라면 가닥이 들어 있는 것 같다고 해서 ‘라면 스프’라고 부르던 치킨 누들 스프를 먹었고, 바삭바삭한 튀김옷이 씹히는 진짜 프라이드 치킨을 맛볼 수 있었다. 가끔씩 아버지는 납작하게 구운 피자를 시켜 손가락으로 집어 드시며 ‘이게 바로 이태리 빈대떡이야’ 하셨지만, 우리에겐 생소한 음식이었다. 황홀한 만찬이 약속되던 그 날은 이른 저녁부터 거실 창틀에 기대선 채, 멀리서 석양의 붉은 빛이 마지막 한 자락까지 모두 사라진 후 한참 지나 컴컴해진 다음에야 아버지가 탄 찝차의 불빛이 미끄러져 들어오는 것을 기다리곤 했다. 우리는 구락부라고 부르던 그 곳에서 돌아올 때면 스프 속에 부수어 먹는 소금 맛 나는 비스켓을 남겨 가지고 와서 며칠동안 아껴 먹으며 그 날의 추억을 음미하곤 했다. 그 당시 부대에 간다는 말은 회사에 간다는 말처럼 우리에게 쓰였었고 어깨부터 발끝까지 수십 개의 지퍼가 달린 조종복은 아버지들의 출근복이었다. 비행장은 철책이 둘러싸인 콘크리트 벽에 둘러싸여 있었고 매일 아침 우리 삼남매를 비롯한 꼬마들이 탄 스쿨버스가 철문을 나설 때는 바깥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발목에 무엇이 들었는지 걸을 때마다 찰랑거리는 소리가 나고 둥근 모자를 쓴 키 큰 아저씨들이 지키는 철문 안쪽의 세상과 학교가 있는 바깥 세상, 어린 나의 눈에 세계는 그렇게 양분되어 있었다. 안쪽 세상에는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 적대적인 사람은 없었고 길을 잃을 염려도 없었다. 본때 없이 철근을 박아 지어놓은 성냥갑 같은 아파트를 들락거리며 우리는 밤이 늦도록 자전거를 탄 채 누비고 돌아다닐 수 있었다. 나보다 몇 살씩 많았던 언니, 오빠의 말에 따르면 저쪽 너머에는 술 마시기 좋아하는 호탕한 신부님과 외국말을 쓰는 수녀님이 계시는 성당도 있었고 겨울에 살짝 얼음이 얼면 아무도 없이 혼자 스케이트를 탈 수 있는 비밀스런 호수가 있다고도 했다. 우리가 진료소라고 부르던 곳에 계신 군의관 선생님은 아마도 법랑질 형성부전이었을 것 같은 나의 유전치들을 모두 뽑아 주셨다. 그때까지도 난 내가 태어날 무렵 월남에서 갓 돌아오신 아버지가 사온 초콜렛을 너무 많이 먹어 이미 이가 썩은 채로 나왔다고 생각했었다.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뽑았던 나의 유구치에는 Furcation을 비죽이 메우고 있던 하얀 ZOE의 냄새가 선명했고 나는 보물상자에 소중히 간직하였다. 오랫동안 손가락을 빠는 습관으로 뻐드렁니가 되었던 우리 오빠에게는 연습삼아(?) Removable Appliance를 하나 만들어 주셨는데, 후에 치과대학생이 된 후 나는 Openbite로 선명히 남아 있는 오빠의 전치부 Mamelon을 발견하고 그 때 일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진료소 못지않게 우리가 자주 들락거리던 곳은 부대 한켠에 자리한 그리 크지 않은 수영장이었다. 방학이면 허락을 받고 꼬마들이 몰려들어 물장구를 쳐대곤 하였다. 땡볕아래 자전거를 타고 달려와 수영장에서 놀던 어느 날, 아버지가 씩 웃으시며 예의 구락부에서 가져오신 누런 종이 봉투를 내미셨다. 안에는 두꺼운 고기와 피클, 양파가 끼워진 진짜 햄버거가 들어 있었고 그 날은 우리 아버지가 영화배우보다 더 멋지게 보이던 날이었다. 불같던 성격에 다른 아저씨들한테는 호되게 구셨던 아버지였지만 우리들에게 다정하셨고 특히 막내딸이었던 내게는 안된다는 말씀을 모르시는 분이셨다. 그 후 예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