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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7)그리운 나의 어머니/권 병 환

제1077번째 이야기



내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어머니께서 주신 아들에 대한
관심이 휠씬 컸다고 믿는다


어머니,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
끝이 없어보이는 긴 뚝길을 지나 넓은 개천이 좁이질때가 되면 거기에 외갓집이 있는 마을이 나타났다. 마을앞 어귀에 곧게 뻗은 신작로. 그 길가엔 계절따라 피고지는 들꽃으로 포장되어 있었다. 나는 지친 다리를 만지고 흙먼지와 떨어진 풀잎사귀를 털어내며 ‘또 가야돼" 하며 이제나 저제나 쉴 수 있을까 투덜거리며 걸었다.


외갓집에 다다르자마자 대청마루에 뛰어올라 큰댓자로 눕곤했다. 대학에 가서야 넓게만 보이던 개천은 밀양강의 작은 지류였고, 뚝길은 일제때부터 강의 범람을 막고 농사를 제대로 수확하기 위해 만든 아주 오래된 방수제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그 옆동네로 신랑의 얼굴도 제대로 못본체 시집을 갔었고 잠시 시댁에 머물다 도회로 떠나며 질곡의 역사속의 한 증인으로서 일제를 거쳐 6.25사변과 우리의 현대사를 꿰뚫고 살아오신 한분이셨다.
소학교시절엔 당신의 백부를 따라 일본으로 가서 주경야독하며 공부하리라는 당찬 신사고를 가진 분이셨건만 그 시절 수많은 어머니들처럼 시집가서 집안의 밀알이 되어 한평생을 보내셨다. 그렇게 비슷한 연배에 계신 분들이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듯이 평범해 보이는 그 시대의 어머니였지만 나에겐 너무나 특별한 분이셨다.


며칠전 신문광고에 ‘어머니는 당신의 아들이 가장 바쁘다고 여기십니다’ 로 시작하며 학교 다닐 때는 공부땜에 자주 못 뵙고, 직장에 가서는 일땜에 연락 못하고, 결혼후에는 애들땜에 바빠서  찾아가지 못하는 아들을 소개하며 부모님께 전화하라는 멘트를 끝으로 한면을 장식한 광고였다. 읽다보니 어쩜 내가 여태했던 행동과 똑같은지, 깊이 남몰래 숨긴 나의 비행이 폭로되듯이 속이 확 달아올랐다. 나에 대한 어머니의 관심과 사랑은 유별한 것이었다. 그 시절 남존여비사상이 마치 허물어지지 않는 절대의 가치였던 시절 칠녀이남의 맏딸로 태어나 손이 귀한 집으로 시집와서 위로 누나 넷을 낳고 아들을 맞이했으니 그 감동이야 오죽했겠는가.


지금도 나는 내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어머니께서 주신 아들에 대한 관심이 훨씬 컸다고 믿는다. 나는 그런 절대의 관심과 사랑을 당연한 것이라 느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싫증나 내팽겨쳐진 수북이 쌓인 장난감들, 언제나 깨끗하게 씻은 파란색 운동화와 새하얀 끈. 잘 다려진 교복바지와 먼지없는 까만색 교복. 가고픈 순간보다 도망치고 싶을 때가 많았던 방과후의 과외시간. 귀찮게만 느껴졌던 두툼한 반찬통과 도시락. 필요없는 큰 돈을 혹시나 모른다며 구겨 넣어 주시던 수학여행길의 쓰지 못할 여비. 소풍 때마다 챙겨주시던 평소에 먹을 수 없었던 외제과자와 음료수들. 나는 그런 것들이 그냥 일상의 생활 속에서 누구나가 누릴 수 없는 것들이라는 걸 알게 된 후론 깊이를 잴 수 없는 관심과 사랑의 포탄을 피하려고만 노력했다.


중학교 3학년 어느 평상시보다 차가운 가을날 아버님은 급히 응급실로 실려 가시고 며칠 후 나는 상주가 되어서 여태껏 보지도 상상하지도 않았던 절차를 따라 너무나 소중한 한분을 보내야만 했다. 그 후론 나는 어머니의 시선과 발걸음을 피해 다녔다. 감당하기엔 너무 구속하는 것 같았고 뿌리치기엔 너무나 깊고 따뜻하고 무한한 절대의 무엇이었다. 그래서 나는 감히 변명한다. 어머니의 시선과 관심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었기에 이렇게 변명하기로 다짐했다.


공부가 남아서 집으로 내려가지 못했고, 봉사활동을 가야해서, 남을 도우고  밀린 일을 하느라 힘든 동료들을 놔두고 가지 못해서, 그래서 어머니를 뵈러 아니 그리도 보고싶은 아들얼굴을 보여주러 가지 못했다고. 아마도 나의 어머니도 짐작하셨으리라. 일이 바쁘지도 공부가 밀리지도 않다고. 저 나이가 되면 으레히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부모의 품안을 떠난다는 것을. 그런 순간들을 조금이라도 늦게 느끼고 싶은 바램으로 그날 저녁, 잘 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