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가진게 없지만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존재한다는 것에 가치를…
주5일근무가 시작되면서 주말이면 도심을 떠나 놀이공원이나 자연속으로 떠나려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의 번잡함이나 꽉 막힌 교통체증을 감수하면서도 잠깐의 휴식을 찾으려는 사람들은 그만큼 삶의 무게가 무거웠던 것일까?
이제 장마가 끝나고 여름의 녹음이 짙어지면 휴가철이 되어 우리의 산하는 사람들로 고달픈 몸살을 치러야만 된다. 레고블럭처럼 반듯하게 잘 쌓아 올린 문명의 이기는 우리의 일터만 높이 올려 놓았을 뿐 아니라, 주거공간도 더욱 고층으로 높이 높이 단단한 갑옷처럼 무장을 하고 드나드는 사람까지 통제하는 지경에 놓이게 되었다. 처음 아파트 층수를 올릴 때 얼마나 대단해 했는가? 나지막한 저층아파트에서 출발해 15층에서 25층으로 63빌딩이 그 높이의 위력을 자랑하더니만 주상복합아파트란게 생겨나고 높이도 66층부터 이제 130층까지 올라간다니…. 인간들의 군상이 하늘높이 뛰어 오르고 있는 듯 하다. 누구네 집에 숟가락 몇 개, 젓가락 몇 개, 밥그릇이 몇 개…. 개똥이네 집에 무슨 일이 있고 누구네 집에 강아지가 몇 마리 태어났는지…. 미주알고주알 시시콜콜하게 관심 많던 이웃집 관심사가 이제는 모르는 게 상책이고 개인의 사생활 보호라는 차원으로 품위 있게(?) 빛바래 간다.
우리의 가족관계 또한 어떠한가? 기껏해야 하나 아니면 둘인 자녀를 키우며 제자식이 최고가 되어야 하고 어느 분야든지 능력 있는 아이가 되어야 한다. 코흘리개에 고무신을 신던 세대는 대여섯 명의 형제가 형님·아우하며 아옹다옹 싸우다가도 밖에 나가면 으레 내 형제 편을 들며 기세 좋게 형제애를 과시했었는데, 지금의 아이들은 다르다. 공들여 잘 길러 논 화초처럼 곱고 예쁘기는 하나 작은 일 하나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의타심과 배타심으로 뭉처져 있는 아이들을 종종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다. 며칠 전‘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라는 TV프로를 보면서 두 형제가 서로에게 난폭한 행동을 하며 울고 떼쓰는 모습에 공감대를 형성한 사람은 얼마나 되었을까? 어떤 물건이든지 손에 쥐면 자기것인양 내 놓지 않는 아이, 공공장소에서 소란스럽게 뛰어다니며 다른 사람의 이목을 찌푸리게 하는 아이, 항상 징징거리고 칭얼대며 떼쓰는 아이, 부모마저 난감해 하는 아이들을 보며 성인이 되면 결혼이라는 당연한 관례에 앞서 참된 부모의 도리부터 가르치는 배움터가 생겨나야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다.
내 부모, 내 형제, 내 자식의 문제가 순순히 풀리지 않으니 친구관계 또한 오죽 하랴! 죽마고우니 관포지교니 친구간의 우정은 책에서나 봄직한 고사성어가 되어버린듯 얄팍한 이해타산에 젖은 친구관계는 현대인을 더욱 외롭게 하나보다. 아이들이 하나·둘이 되면서 형제간의 우애마저 돈독치 않는데 남과의 우정을 바란다는 건 사치스런 바람이 아닐까? 그 외로움과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모진 목숨을 끊는 일부 사람들의 모습은 우리를 안타깝고 서글프게 한다. 넓은 세상 들녘 광야에서 목 놓아 울 수 있는 자유와 호기가 없어서 일까? 굽이치는 한강의 다리위에서 투신하려 하고, 달려오는 전동차에 몸을 날리는 이가 있다는 것은 분명 서글픈 일이다.
스스로를 포기하기 보다는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며 익혀야 되지 않을까? 내 주장을 펼치기 보다 남의 사정에 귀 기울이며 배려해 줄 수 있고 나를 헤아려 줄 수 있는 사람이 그리울 때다. 가진 자는 더욱 더 가지려 하고 없는 자는 없음에 한을 쌓고 가진 자에 대한 원망과 울분을 쏘아 올리는 사람들의 욕망이 눈덩이처럼 불어만 간다. 군에서 일어난 총기난사 사건이니 10대들의 무서운 범죄행위니 눈뜨면 늘어나는 놀라운 사건들을 접하며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은 이게 아니란 생각이 조수처럼 밀려온다. 나와 맞지 않는다 해서, 나와 조금 다르다 해서 그것을 참지 못하고 뒤틀리고 꼬여버린 감정으로 결국 최악의 사태까지 치닫는 사람이 있다는 건 우리 모두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