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갑·고희가 될때까지
선후배와 같이 연주하며
늙어 가고픈 마음이다
내가 ‘덴타폰’과 인연을 맺게 된 때는 1984년 대학 입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 대학에 들어와서 어느 동아리에 가입을 할 것인가 고민을 했었다.
치과대학 내의 동아리는 재수생을 꺼려했던 분위기라 대학을 재수한 내가 들어 갈수 있는 동아리는 많이 없었다. 그런데 유독 마음에 끌리는 동아리가 눈에 들어 왔다.
덴타폰이라는 치과대학 내 그룹사운드 동아리였다. 그때 생각으로는 그 동아리가 남보다 튀어 보이면서도 폼나는 동아리라고 느꼈었다. 그래서 나는 덴타폰에 몸 담아 젊을 때 혈기를 쏟아 부어 즐거운 추억을 남겨 볼 요량으로 이 동아리에 가입 했었다.
그 당시에는 아마 20대의 치기어린 배짱으로 젊음을 불살라 보자는 그런 가소로운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해서 동아리 생활은 시작되었고 방학도 없이 매일 학교에 출근해서 아니 연습실에 출근해서 멤버들 끼리 연주(演奏)을 했었다. 진짜로 말하자면 연주(連酒)를 더 많이 했었던 것 같다. 그때 동고동락했던 선후배들은 정도 많이 들어서 지금도 같이 어울리고 그때 겪었던 재미있었던 일들을 안주 삼아 술을 마시기도 한다.
아마 누가 나에게 대학 다닐 때 제일 잘한 선택이 무엇이었냐고 물어본다면 덴타폰에 가입한 거라고 서슴지 않고 대답할 것이다. 그 만큼 젊은 날의 내 머릿속에 소중한 기억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 흘러 2000년에는 우리 덴타폰이 20주년을 맞아 성대한 공연을 했었다.
예전부터 마음은 있었지만 개업 초창기라 여유가 없어 무대에 서지 못했던 선배들이, 20주년 때에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치과의사로서의 활력소도 필요했기에 1기 선배들부터 20기까지 모두 나와서 감동의 도가니탕을 만들어 냈다.
마지막 곡으로 We are the champion을 전부 다 무대에 올라 와 불렀는데 너무 감격한 나머지 눈물을 왈칵 쏟을 뻔 했다. 그땐 나도 어설픈 로커 흉내를 낸다고 검정색 바지에 검정색 나시, 검정색 샌들을 장착(?)하고 출연했었는데 지금 그 모습을 생각해 보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 20주년 그 이후 예전부터 우리가 꿈꿔오던 스튜디오도 만들고, 늙다리 선배들이 뭉쳐 개업의로 구성된 오비 밴드가 5팀이나 만들어졌다. 이제는 어떤 밴드에도 부럽지 않은 시설과 팀워크를 갖추었다고 자부한다.
실력은 演奏보담 連酒가 더 많아 다른 밴드에 비해 다소 떨어지지만, 20주년 이듬해부턴 1기 선배에서부터 22기 후배까지 모두 나와서 매년 봄, 가을로 두 번씩 연주회를 꾸준히 하고 있다. 재작년에는 무슨 재미있는 일을 해보자는 생각이 언뜻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 내 나이 40! 불혹을 기념해서 뭔가 즐거운 일을 하나 만들어 보고 싶었다.
그룹사운드를 하면서 대학가요제에 나가서 상을 받아보는 그런 상상은 밴드를 하는 사람은 누구나 가져봤을 것이다. 나는 젊었을 때의 꿈에 대한 미련 때문에 대리만족이라도 느껴보려고, 후배들을 앞세우고 매니저로 참가했었다. 그래서 그해 부산 록 페스티벌과 대학가요제에 후배들을 이끌고 두 군데 다 출전을 했으나 보기 좋게 낙방, 경험도 부족했지만 역시 아마는 프로와 상대가 되지 않는 법.
하지만 내가 고생한 만큼 추억도 보람도 느꼈으니 굳이 손익을 따지자면 이익이 많았다고 자위하면서 아쉬움을 달랬다.
20주년 이후 어느덧 또 5년이 흘러 2005년이 되어 25주년 행사를 8월 13일에 하려고 한다. 아마 이번엔 후배들이 엄청 큰 공연을 준비하고 있는 것 같던데 벌써부터 마음이 소풍가는 전날 밤 어린이 마냥 들뜬다.
20주년 때에는 붕어빵 같이 닮은 자식들이 무대에 나와서 노래도 부르고 연주를 한 아빠·엄마게 꽃다발을 전해주는 예쁜 모습도 보여 주었는데 25주년 때는 애들이 커서 좀 더 멋진 무대를 만든다니 이 또한 재미있는 장면이 연출 될 것 같아 내심 기대가 된다.
나도 내가 20주년 때 보다 오버를 안한다는 보장은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