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나 미래의 몇 억보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단 몇만원이 더 가치 있다
어느덧 무더위가 가시고 가을 냄새가 스며드는 9월 월요일 날, 오전진료가 거의 끝날 때 쯤 진료실에서 훤히 보이는 불암산을 쳐다보고 있는 P원장에게 치과위생사 K양이 다가와 말을 건넨다.
“원장님! 친구분이 오셨는데요.”
P원장이 환자 대기실에 나가보니 실로 오래간만에 보는 고등학교 동창생 S씨이다.
대기업에서 승승장구 하면서 최연소 승진한다고 친구를 통해서 간헐적으로 들었건만 이렇게 갑작스런 방문에 P원장은 의아해 했다.
“자, 들어가서 차 한잔하자.”
원장실에 들어와서 마주본 S씨의 얼굴을 천천히 훑어보니 그리 밝은 모습이 아니다.
“남들보다 먼저 승진해서 일찍 이사까지 됐다가 퇴직하고, 몇 년 동안 조그만 사업이라도 해보는데 잘 안되는구만. 오늘도 갑갑하고 마누라 눈치보여서 자네한테 한번 들러봤네. S이사님이라는 소리가 아직도 귀에서 맴도는데 내 신세가 말이 아니네.”
미소를 띄우며 P원장이 대답했다.
“S이사님 이라는 허상에 아직 묻혀 있구만. 오래간만에 만난 친구에게 이런 말은 무리가 있을 줄 아네만, 죽어있는 것에 너무 매달리지 말게나. 과거는 지나간 껍데기에 불과하네, 잊어버리게.”
S씨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과거가 있기에 현재가 있지 않은가.”
“그렇지, 과거는 현재가 있기 위한 하나의 디딤돌이 됐지만 그것은 허상이 아닌가! 미래 역시 마찬가지지. 어떤 모습이 내 앞에 다가올지 전혀 알 수 없지 않은가! 살아 움직이는 이 시간 이 자리에서 나 자신을 느끼지 못하게 되면 꿈속에서 허우적 거리는 시간만 남게 될 것 같네.”
“그러면 미래에 대한 희망도 의미가 없단 말인가.”
“인생이란 배를 띄우며 항해하는데 아무런 방향없이 갈수 있겠나. 그것은 방향일 뿐 내가 느끼며 만질 수 있는 지금의 살아있는 시간이 아니란 말이네. 모든 것은 변하고 있네. 매일 보는 해와 달도 어제의 것이 아니고 매일 보는 직원들의 얼굴도 달라져 있지. 다만 내가 똑같다고 느낄 뿐이지. 주변의 변화를 내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고집일지도 모르지. 주변의 변화가 크게 와 닿을수록 자신은 과거나 미래에 더 매달리게 되고 현재가 더 심한 고통으로 자신을 억누를 걸세. 내 앞에 펼쳐지는 생생한 모습들을 만지고 쳐다보지도 않고, 고개를 돌리고 외면한 채 꿈속에 있으면 이 자리가 행복해 지겠는가.”
S씨는 알 것 같으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이다.
P원장의 말이 계속 이어진다. “쉽게 말해서 과거에 써버린 몇 억의 돈이나 미래에 벌 수 있는 수많은 돈 보다도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단 만원의 돈이 더 가치 있고 의미가 있다는 것이네. 자네나 나나 모두 행복해지려고 노력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이 행복해지려는 마음에 가장 큰 장애물이 내가 볼 땐 습관화(habituation)일세. 큰 평수의 아파트나 좋은 외제차를 살 때의 설레임이나 만족감도 조금 지나면 내 마음이 느끼지 못하고 습관화, 일상화 되버려서 더 큰 자극이 오기 전에는 기본적인 생활이 되어 버리지.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은 내가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요, 저녁에 잠이 드는 것은 내가 죽는 것이 아닌가.
하루살이가 하루를 전체 인생으로 열심히 살듯이, 저녁을 죽음이라 생각하면 하루가 엄청나게 길수도 있고, 짧은 시간이 짧지 않을수도 있지.
아침에 일어나서 어제의 45평의 아파트가 오늘 20평으로 줄어 들었어도 20평의 아파트를 안고 아침에 인생을 출발하는 것이 얼마나 많이 갖고 시작하는 것인가. 병들지 않고 건강한 몸으로 일어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
내가 일하러 나갈 수 있는 오늘이 또한 얼마나 즐거운가.
죽어버린 어제에 집착하지 않고 지금 이 자리 내 주변의 것을 느낄 수 있을 때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네.
이사님이라는 마음속에 버리지 못한 허상을 버리고 꿈틀거리는 지금 이 순간을 내 앞에 마주 세워서, 그것을 느낄때 어떤 작은 일이라도 의미있고 즐겁게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