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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8)검정 비닐봉지/이한우

 

낮고 비천한 것들에
버려지고 소멸하는
모든 것들에 경의를…


아침 출근 길 이었다. 하늘은 흐렸으나 지난 밤 일기 예보에 비 소식은 없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침의 찬 공기를 즐기며 서서히 걸어 나갔다.


나는 차의 소음과 매연이 싫어 가능하면 골목길로 다닌다. 봉곡 성당 뒤 좁은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골목 저편에서 이편으로 바람 한 떼가 몰려왔다. 바람은 낙엽들을 일으켜 세워 우루루 길바닥을 쓸며오다가 길 한편에 처박힌 검정 비닐봉지 한 장을 툭 차서 공중으로 띄워 올렸다. 초등학교 시절 등교 길, 차고 다니던 찌그러진 깡통 같았다. 비닐봉지를 이리저리 차고 다니던 바람은 이내 실증이 났는지 골목 한 구석에 봉지를 처박고는 휑하니 다른 곳으로 달려갔다.


골목의 끝을 돌면 서부시장이 나타난다. 건널목을 건너서 시내 쪽으로 막 접어들 무렵 갑자기 비가 오기 시작했다. 약간은 굵은 빗발이 안경에 사선을 그으며 발걸음을 막았다. 민방위 훈련 공습 경보가 울릴 때처럼 사람들은 급히 여기저기로 몸을 피했다. 병원까지 앞으로 십여 분, 맞고 가기엔 무리였다. 나도 약국 옆 처마로 몸을 피했다. 아무도 우산을 준비한 사람은 없었다. 모두들 기습적인 비에 난감해 하는 것 같았다. 저 쪽 교차로에서 붉은 신호가 들어왔는지 갑자기 4차선 도로에 차들이 텅 비었다. 텅 빈 거리 위를 바람에 쓸린 낙엽들만 와그르르 굴러 다녔다. 조금씩 젖어가는 낙엽들이 보도에 몸을 밀착시킨 채 입술을 바르르 떨고 있었다. 시간이 정지한 듯 안개비에 젖어 사위가 고요해졌다.


그때였다. 거리의 배경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몰려들었다. 할머니 한 분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이런 비쯤은 아랑 곳 없다는 듯 여유롭게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할머니의 머리에는 검은 비닐봉지가 씌워져 있었다. 그래서 마치 검은 나비가 팔랑거리며 낮게 날고 있는 것 같았다. 자세히 보니 검정 비닐봉지의 양쪽 귀퉁이를 매듭지어 스카프처럼 맵시있게 둘렀다.


검정 비닐봉지! 음식을 담거나 싸는 투명한 혹은 흰색의 봉지가 아니고 속의 내용물을 감추기 위한 검은 색의 봉지. 흙 묻은 푸성귀 몇 단을 담아 흙투성이가 되거나 툭툭 잘린 고등어 몸퉁이의 비린내에 몸 절이는 검정 비닐봉지. 종량제의 늘씬한 노란 비닐 봉투 옆에 온갖 잡동사니를 쑤셔박고 허리가 터진 채 불법으로 버려진 검정 비닐봉지. 길 가 아무데나 버려져 이리저리 치밟히는 검정 비닐봉지. 흔하고 값싸고 하찮은 검정 비닐봉지. 그 비닐봉지 한 장이 오늘은 멋진 스카프 우산이 되어 가을비 속을 팔랑거리며 날아가고 있었다.


비가 그쳤다. 해제 사이렌이 울리면 숨어있던 사람들이 나오 듯 여기저기에서 비를 피하던 사람들이 하나 둘 나오기 시작했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사람들은 비에 지체된 걸음들을 서둘러 어디론가 떠나가기 시작했다. 주춤거리며 보도에 선 나의 눈길은 길 한편으로 멀어져 가는 검정 비닐봉지에 한참을 머물렀고 할머니는 여전히 팔랑거리며 무대의 저편으로 나가고 있었다.
나의 졸시 ‘검은 나비’는 가을비 젖은 회색의 하늘을 배경으로 그렇게 팔랑 떠올랐다. 세상과 내 안의 낮고 비천한 것들에, 버려지고 소멸하는 모든 것들에 경의를….

 

검은 나비


텅 빈 보도 위에
검정비닐봉지 하나 걸어온다
머리에 봉지를 둘러 쓴 할머니
팔랑팔랑 걸어온다
손잡이 부분을 앞쪽으로 매듭지어
스카프처럼 묶었다


는개비 내리는 아침
하찮은 몸퉁이나 쓸어안다가
바람의 허파로 골목이나 부풀리던
검정 비닐봉지
오늘은,
검은 나비처럼 걸어온다, 팔랑팔랑

 

이 한 우

·79년 서울치대 졸
·진주 건강한치과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