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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3)아버님의 선물/김지학

좁은 세계에 안주하지 말고
다양한 사회경험으로
그 세계를 벗어나도록…


얼마전 대구에 사시는 장모님이 병환으로 입원하셨다는 소식에 두 아들놈과 함께 병문안차 대구행 KTX를 타게 됐다. 집사람은 둘째놈 대학 입시 설명회 때문에 못가게 되어 오랜만에 3부자가 같은 공간에서 여러 시간동안 마주 볼 기회를 가진 것이다. 다른 집안도 그런가 모르겠으나, 딸자식이 없는 우리 집안에선 드문 시간이라 흐뭇한 기분도 들었지만 평소 대화훈련이 부족해 서로 긴 얘기는 나누지 못했던 것 같다. 이런 기회에 인생과 진로에 대해 도움 되는 얘기도 들려주고 아이들의 생각을 들어보는 아버지로 좀 폼 잡아야하는데 과연 이놈들이 날 어떤 아버지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동시에 10년전에 돌아가신 내 아버님을 떠올리고, 빠른 속도로 스쳐가는 창밖 풍경을 보며 잠시 회상에 잠겼다.


어릴 적 아버님의 이미지는 시골서 자라 자수성가하신 사업가, 손주 열댓명중 유일한 손녀마저도 남자애였으면 하고 애석해하시던 보수주의자, 너무 부지런해서 살찔 틈이 없었던 강골기질의 촌부, 부모가 구해준 배필만을 강요하신 중매결혼 예찬론자 등등.
항상 긴장감을 갖고 대해야 했던 아버님에 대한 기억은 부드러움보다는 딱딱함 그 자체였다. 대화라기보다 일방적으로 훈계 받고 지시받는, 도저히 거역하기 힘든 훈장님 분위기가 내 어릴 적 남아있는 느낌이다. 20여 년 전 유학을 가겠다고 말씀드렸을 때 아무 말씀 없으시다 며칠후 하신 단 한마디로 난 그냥 포기해야만했었다.“자식들이 보고싶을때 하시라도 볼 수 있게 가까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아버님의 삶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내가 몰랐던 참모습을 보게 되었고, 백마디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시는 사랑과 가르침을 하나씩 깨닫게 되었다. 당시 부산에서 상당한 규모의 신발회사를 경영하시던 아버님이 어느 날 갑자기 회사에 의무실을 만들 계획이니 날보고 일주일에 두 번씩 내려와 관리를 하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총무과장 직책을 줄테니 5000명이 넘는 회사종업원들의 복지를 책임지라는 황당한 얘기였다. 치과밖에 배운 게 없고, 서울서 개업한 처지에 주 2회 부산출장이 웬말이냐고 어머님께 도움을 청했지만 아버님의 고집을 꺾을 재간이 없었다. 처음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아버님의 결정으로 멀쩡한 집사람 주말과부 만들면서 불만스럽게 시작했지만, 그 후 10여년동안 사내 복지 개선을 위해 많은 것을 배우면서 내 평생 다시는 경험하지 못할 나만의 추억을 만들게 되었다. 의무실내 개설된 치과에서 무료 진료하는 것 외에 주부종업원을 위한 탁아소 운영, 영양사와 함께 구내식당 식단관리, 안전사고교육, 매달 직원생일 축하이벤트, 청각장애종업원과의 의사소통을 위한 해당부서별 수화교육, 지체부자유 종업원을 위한 편의시설 개조, 회사사보 제작, 신문, 방송관련 홍보활동 등 치과의사로서는 접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인생을 경험하게 되었다.


1970,80년대는 경제성장만이 우선인 사회분위기속에 이런 복지시설이 구비되고 장애인을 채용하는 회사는 거의 없었으나, 아버님의 기업경영철학이 오히려 직원들의 사기를 높여 회사에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 신문에 보도가 되곤 했고 아버님은 수출무공훈장 받은 것보다 이런 보도를 더 자랑스러워하셨다.


당시 신발산업은 많은 인력이 필요한 노동 집약성 분업형태인데다 열악한 작업환경으로 안전사고가 빈번했었다. 특히 신발밑창을 접착하는 압착기의 조작미숙으로 손가락이 절단되는 사고가 잦아, 경각심을 주기 위해 잘린 손가락을 알코올 병에 넣어 작업장에 비치할 정도였지만 일년에 몇 차례 사고가 발생하곤 했다. 종업원들은 대부분 타지방에서 돈벌러와 가족 없이 혼자 있는 경우가 많아, 그때마다 사고종업원이 퇴원할 때까지 병실을 지켜주며 가슴 아파하시던 아버님의 모습에서 난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가르침을 받았다고 자부하고 싶다.
5남매중 혼자 서울에서 떨어져 사는 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