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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1)나의 사랑니/이웅호

무서움과 아픔을 겪지 않고
환자의 아픈 상처를 보듬는
진정 옳은 치료를 할 수 없어

 

불행은 늘 혼자서 찾아오는 법이 없다 했던가, 나는 요즘 그 고초를 단단히 겪고 있다.
며칠 전 딸애가 사귀던 남자친구와 헤어진 후 아예 식음을 전폐하고 들어 누워 버렸고, 월급 받은 다음 날 아무 연락 없이 출근하지 않는 간호사에다가, 무척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다 만들어진 보철물을 한 달째 씌우러 오지 않는 환자까지 내우와 외환이 함께 겹치니, 그야말로 진퇴양난에 사면초가라, 급기야는 내 온 잇몸이 화들짝 들쳐 일어나고 말았다.


차거나 뜨거운 것을 먹을라치면 극심한 고통이 따르고 조금이라도 질기고 단단한 음식은 아예 씹을 수가 없을 뿐더러 온 입천장마저 따끔거리니 졸지에 중증 치과환자가 다 되어버렸다. 그래도 당장은 치료 받을 엄두가 나지 않아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어제 퇴근길에 야간진료를 하는 후배 치과를 들렀다.


“전체적으로 잇몸수술도 좀 하고, 신경치료와 함께 사랑니도 이 기회에 뽑는 게 낫겠습니다.”
조심스러운 후배의 진단은 내 생각 그대로의 녹음방송이기도 하련만 그 선고를 듣는 순간만큼은 어찌 그리 사람을 옥죄이게 하던지….


나의 왼쪽 사랑니는 직각으로 기울어진 완전매복 상태이나 우선은 별 탈이 없지만, 오른쪽은 45도쯤 기울어진 부분매복 상태로써 앞니 옆구리를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다. 대학 임상실습 시절 높은 점수의 발치 케이스라 동료들에게 무수한 회유와 공갈협박을 받았지만 잘도 견뎌내며 무려 20여 년을 버텨온, 너무나 소중한 ‘수지부모’의 ‘신체발부’가 아니던가. 실연 당한 후 홧김에 머리카락 싹둑 잘라버릴 일도 아닌데다가 평소 다른 환자를 치료해본 경험으로 그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나로서는 한시바삐 그 자리를 벗어나고픈 마음뿐이었지만 그래도 어이하랴 내 코가 석 자라, 진료에는 지장 없도록 이번 토요일 오후에 발치와 근관치료를 함께 하기로 약속하고 돌아왔다.


예전 어떤 환자분이, 치과치료가 너무나 두려워 치료 받기 전에 한웅큼의 진통제를 입안에 통째로 털어 넣고 그것도 모자라 치료할 치아에다 도포마취제를 도배하듯 뿌리고 왔다는 이야기를 상기하며, 지금의 나도 그러고 싶은 마음 굴뚝같다.
공포에 떠는 환자에게 좋은 말로 안심시키며, 뻔히 아픈 치료임에도 좀 참으면 되지 무어 그리 아프다고 엄살떠느냐고 웃음 짓던 예전의 치과의사는 어디로 가고 없고, 이젠 도살장 문 앞에 선 한 마리 가련한 짐승으로 남은 것이다.


오호 통재라, 어여쁘다 사랑니여. 아깝다 사랑니여. 그러나 나는 용기를 내어야 한다. 이 무서움과 아픔을 제대로 겪어내지 않고서는 앞으로 다른 환자의 아픈 상처를 따뜻이 보듬어주는 진정 옳은 치료를 할 수 없으리라고 나 자신에게 세뇌시켜 본다.
오늘도 나와 같은 처지의 환자가 한 명쯤은 찡그린 얼굴로 치과를 찾아올 것이다. 그러면 나는 오랜 친구 대하듯 온화한 미소를 띠며 아주 상냥스럽게 첫 서두를 이렇게 시작하리라. “나도 이 지경을 겪어보아서 아는데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