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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칼럼 -삶- 허영엽신부(천주교 서울대교구 홍보실장)]카타콤바란 무엇인가?

로마의 여행객들이 빠지지 않고 찾는 장소중에 하나가 바로 카타콤바이다. 카타콤바는 초기 그리스도 교인들의 지하묘지로 알려져있다. 나폴리·시라쿠사·몰타·아프리카·소(小)아시아 등의 여러 지방에서 볼 수 있는데, 특히 로마 근교에 많다.


카타콤바는 원래 그리스어 ‘카타콤베"로 ‘낮은 지대의 모퉁이"를 뜻한다. 16세기에 초기 그리스도 교도의 지하묘지가 발견되고부터 모든 지하묘지를 카타콤바라 부르게되었다. 이와 같이 지하에 묘지를 두는 풍습은 동방에서 전래되었으나 그리스도 교인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면서 지하묘지의 풍습이 더욱 성행한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카타콤바라는 말은 옛 로마인들이 사용했던 라틴어와 그리스어가 섞여진 ‘카타쿰바스"(구덩이 또는 동굴의 옆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당시 로마의 가난했던 사람들은 그들 가족을 위한 무덤을 땅 위에 만들 수 없었다. 그래서 돈이 가장 적게 드는 방법을 생각해 낸 것이 이 지역 곳곳에 흩어져 있던 자연적인 동굴을 이용해서 무덤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자연적인 동굴도 거의 다 무덤으로 차 버리자, 그때부터 땅을 파고 지하에 무덤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그때가 1세기 중엽부터였다고 한다.


로마의 이교도들은 자신들의 무덤을 ‘네크로폴리" 즉 죽은 자들의 장소라고 불렀다. 반면에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무덤을 ‘체메테리움"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잠자고 있는 중 또는 쉬고 있다는 뜻이다. 이 체메테리움(현재는 이탈리아어로 치미테로라고 부름)이라는 말은 초기 그리스도인이 스스로 지어 낸 말로써, 그들은 자신들의 무덤이 이교도들이 사용했던 ‘네크로폴리"라고 불리는 것이 싫었기 때문에 새로 만들어진 이름이었다.


그리스도교가 종교의 자유를 얻은 것은 313년이다. 그 후 교황 성다마수스(366∼384)가 로마의 아피아 가도 주변에 있던 성세바스티아누스의 무덤을 포함해서 그 일대의 지하 공동묘지를 재정비하고 이곳을 성세바스티아누스의 지하 공동묘지라고 명명하면서 처음으로 ‘카타쿰바스"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그 후 중세기 때부터는 초기 교회 공동체의 지하 공동묘지(주로 1세기에서 4세기 초까지) 전체에 대해 일반적으로 카타콤바라고 널리 사용하면서 현재까지 내려온다.
네로 시대의 박해를 비롯해 그리스도교인들은 심한 박해를 받게 되었다. 첫 박해를 전후해 초기의 선교활동은 로마 근교에 살던 가난하고 신분이 낮은 계층 사람들에게 주로 많이 행해졌다. 그들이 살던 지역은 주로 테베레강 어귀와 아피아 가도 주변이었다.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면서, 신자들은 예전처럼 자유롭게 모임을 가질 수가 없었다. 자연히 신자들은 주위의 눈을 피해 로마의 성 밖에서 은밀히 모였는데 그 중에서도 아피아 가도 주변에 많이 있던 지하 무덤 안이 가장 안전한 장소가 되었다. 급기야는 신자들의 무덤도 그 안에 마련되면서 지하 무덤, 즉 카타콤바의 면적이 점점 더 늘어나기 시작했다.
카타콤바에 남겨진 수많은 벽화는 고대 이교미술과 중세 그리스도교 미술의 변천과정을 한 눈에 볼 수 있어 예술사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흥미롭다. 카타콤바 유적은 로마시의 관광 코스에 포함되어 있고 순례자 등 방문객이 끊이지 않는다. 카타콤바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현실적인 피난처였으며, 하느님을 찬미하는 미사를 거행할 수 있었던 교회였고 또한 죽어서도 가까이 있고 싶어했던 그들만의 보금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