옳지 못한 선입견과
싸구려 동정심은 있지 않았나
일상에서 늘 반성을 한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 끝자락의 날씨가 심상치 않다. 한낮의 기온이 30도를 넘었다는 보도가 뉴스의 첫머리를 장식한다. 작열하는 태양과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때 이른 일광욕을 만끽(?)하는 비키니 차림의 젊음. 신록의 그 연하고 고운 자태도 어느덧 짙푸르러졌다. 오전 진료를 마치고 한낮의 거리로 나서면 달아오른 아스팔트에서 ‘훅’ 끼쳐오는 더위에 그늘이 그리워진다.
작년 가을에 함평의 한센인 정착촌에서 생활하시는 어르신 몇 분이 우리병원에 진료를 받으러 오셨다. 그곳에서 정기적으로 하던 보철 치료가 끝났기 때문에 치아가 불편하시면 오시는 것이다. 그분들 중에 우리가 술보 할머니라고 별명을 지어드렸던 할머니께서 호박 몇 덩이를 가지고 오셨다. 검고 골 깊은 주름살이 예사롭지 않은 그간의 세월을 담고 있는 얼굴을 한 술보 할머니께서 “김선생한테 드릴 것은 없고 짜잔하나마(*짜잔하다-전라도 사투리, 작고 보잘 것 없음) 우리 집에 있는 것이라 호박죽이나 만들어 자시라고(*자시다-전라도 사투리, 먹다의 높임말) 가져 왔소.” 하면서 어색하고 짜잔한(?) 웃음을 지으시며 내게 그것을 내미셨다.
실은 내 고향도 함평이다. 함평의 한쪽 귀퉁이에 붙은 마을 (함평 속의 함평)에서 나는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 우리 소리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호남가’ 첫머리가 ‘함평천지 늙은 몸이 제주 어선~’으로 시작하는데 그 함평이 바로 내 고향이다. 지금이야 5월이면 ‘나비 축제’로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 될 정도로 어지간히 유명해졌지만 한반도 서남단의 끝자락에 큰 바윗돌 사이에 낀 작은 돌같이 작은 고장이다. 서쪽으로는 조기 어장으로 유명한 칠산 바다를 끼고 있지만 논농사가 주업인 전형적인 농촌이다. 초등학교 때 학업을 위하여 광주로 나와 대학까지 졸업하고 지금도 생업을 광주를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어려서 어머니께서 해주시던 호박죽같은 농촌에서 익숙하던 것들에 지금도 입맛이 친숙해 있다. 자주 접할 수 없기 때문에 어쩌면 그런 것들이 더 간절한지도 모른다. 그 귀한 것을 술보 할머니는 짜잔하다며 어색해 하신다.
함평의 한센인 정착촌인 ‘재생원’을 처음 방문하였을 때는 지금은 중학교 2학년이 된 우리 큰 아이가 유치원에 다닐 때였다. 그러니 벌써 10여년 전 일이 되었다. 재생원…. 지금이야 광주에서 목포로 가는 4차선 국도변의 마을이라 교통은 편리하지만, 처음 이곳에 터를 잡았을 때를 상상해 보면 농토라고는 하나도 없는 산비탈에서 무엇으로 어떻게 재생하라고 이름마저 ‘재생원’이라 하였는지 답답함이 들었다. 그분들이 재생을 하겠다는 것인지, 사회가 그분들을 이 척박한 땅에 내몰고 재생을 하라는 것인지. 아무튼 처음 내가 받았던 느낌은 명치끝이 답답해 오는 것밖에 없었다.
마침 수박이 흔하게 나오는 계절이었다. 처음 가던 날, 그분들께 드리려고 수박을 몇 덩이 사가지고 갔었는데 마을 회관에서 그 수박을 함께 나누어 먹으면서 손가락이 없는 어떤 어른이 수박 한 조각을 나에게 건네면서 먹으라고 권하셨다. 손도 없는 노인이 그것도 한센병 정착촌의 노인이 수박을 건네주었을 때 순간적으로 마음에서 갈등이 일었다. 나도 모르게 “감사합니다”하면서 받아는 들었으나 삼키는 데는 너무나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수박을 삼키는 순간 나의 간절한 바람과는 다르게 목에서 거부 반응이 왔다. 시원하지는 않았지만 더위 속에서 먹는 수박 맛이야 무엇에 비길 것인가. 그럼에도 내게 거부반응이 나타난 것은 수박 때문이 아니라 내 안의 잘못된 마음 탓 아니겠는가. 그분들의 일그러진 모습, 돼지우리에서 나오는 냄새 그리고 막연한 두려움 등이 뒤엉킨 탓이었으리라. 나는 수박을 간신히 목으로 넘겼다. 그것을 지켜보시던 그 어른의 얇은 미소를 나는 볼 수 있었다. 평소에 정상인들로부터 가식적인 친절에 너무나 많은 속임을 당한 터라 그것이 자신들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