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환, 윤형주, 그리고 송창식이 함께하는 자칭 빅3콘서트
아주 우연한 기회에 아주 절친한 지인으로부터 20년전으로의 시간 여행을 초대받았다. 김세환, 윤형주, 그리고 송창식이 함께하는 자칭 빅3콘서트는 시계바늘을 20년쯤 전으로 돌려놓은 시간이었으며 불러지는 노래 한 곡 마다 사연이 있었고 노래마다 추억이 어려 있었던 애창곡 모음집같은 무대이고 그때의 분위기를 느끼게 하였다.
입장 할 때부터 대충 알만한 사람들이 부부가 함께 한 모습으로 눈에 많이 띄는 것만으로도 그 시절로 돌려 놓은 듯 하였고 김세환은 ‘길가에 앉아서’나 ‘사랑하는 마음’ 그리고 ‘좋은걸 어떡해’ 등 이런 노래로 울고 웃었던 70년대의 아릿한 추억을 끊임없이 반추하게 하였다.
더구나 근래에 나훈아의 노래를 리메이크한 ‘영 영’이라는 노래를 불러 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청중들의 지금의 심정을 대변하기도 하였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이제 밤도 깊어 고요한데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이 밤이 지나가면 나는 가네 그대 아닌 사람에게로... 내 원치 않는 사람에게로’하며 부르던 ‘웨딩 케익’이라는 그 유치찬란한 가사들이 왜 그 시절에는 그처럼 가슴에 와 닿고 어디에서든지 읊조리게 하던 곡이었는지....
지난 68년 2월에 결성되어 그 이듬해 12월에 해체될 때까지 몇곡 안되는 즉 ‘하얀 손수건’이나 ‘축제의 노래’, ‘웨딩 케익’과 같은 번안가요 중심의 노래를 불렀던 투윈폴리오의 노래가 당시의 젊은 우리에게는 장발머리, 통기타와 청바지로 대변되는 하나의 상징물이 아니었나 싶다.
거기에 당시의 남진이나 나훈아 그리고 이미자 등 트롯트 형식의 대중가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 비해 조금은 지적이라는 가당치 않는 우월감도 가미된 것인 것 같기도 하고....
세시봉에서 시작된 투윈폴리오는 22개월의 짧은 활동에도 불구하고 우리 대중음악사에 새로운 장르를 이루는 큰 물줄기의 근원이 되었다고 알려진다.
통키타 1세대로 구분되는 이 투윈폴리오가 해체되어 각기 솔로로 활동하면서 노래하던 윤형주는 몇달 후면 출가한 딸에 의해 본의 아니게 할아버지가 된다면서도 그 고운 음성은 아직도 우리의 심금을 울리기에는 충분하였다.
‘어제내린 비’, ‘우리들의 이야기’ 등을 불러 마치 봄비가 내린 광주의 청중들을 흠뻑 적시게 했음은 물론이고 더구나 윤형주는 자신이 작곡하고 불렀던 귀에 익은 몇곡의 CM송들을 들려주어 그 시절 그 추억으로 이끌기도 하였다.
넉넉한 웃음과 특유의 한복을 입은 송창식은 그 시절과 하나도 변하지 않은 음색으로 지금까지 8000번 정도는 불렀을 거라는 ‘왜 불러’와 ‘한번쯤’ 그리고 ‘고래사냥’을 열창하며 무대와 청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를 보여주었다.
70년대 당시 박정희 정권의 군사독재가 극에 달하고 개발독재의 억압과 유교적 금기로부터 탈출구를 찾던 당시 젊은 우리들은 사회비판과 정권에 대한 저항성이 있으면서도 경쾌한 비트 리듬과 발랄한 음색의 포크에 열광하였다.
그러나 유신선포와 함께 ‘아침이슬’을 시작으로 송창식의 ‘고래사냥’이나 김민기가 작사자라는 이유만으로 또는 이유같지 않는 이유로 사백여곡이 넘는 많은 금지곡이 양산되면서 가사와 멜로디가 서정적인 경향으로 많이 바뀌다 보니 특유의 저항정신이 탈색되기도 했다.
하지만 포크의 일부는 지하로 숨어들었고 금지곡들은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면서 더욱 끈질긴 생명력을 바탕으로 당시의 청년문화를 대변한 것으로 생각한다.
지금은 40대지만 우리도 한때 고래처럼 술마시고 노래하며 자유와 낭만을 꿈꾸던 신세대였다.
그간 급속한 사회변화와 컴퓨터의 등장으로 문화의 주변부로 밀려나 정체성의 위기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이른바 신세대와 쉰 세대의 중간에서 낀 세대로 불리우는 우리도 송창식, 윤형주 그리고 김세환 듣기만 해도 정겨운 이름들과 함께 암울했던 70년대를 보냈다.
포크송은 동해바다의 낭만과 캠퍼스의 추억이며 구속받고 싶지 않는 자유를 꿈꾸던 젊은 우리들의 우상이었고 새로운 세계를 향해 열린 희망과도 같은 탈출구가 아니었을까?
그런데 지금은 나훈아 노래도 너무나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