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이라는 작은 파랑새를 통해
자기 속에서 충만을 찾고
스스로 살아갈 맛과 힘을 찾아
언젠가 그런 글을 본 적이 있다.1 김윤식 교수가 예전 동숭동 캠퍼스에 있을 때, 그 때는 당연히 김현(1942~1990) 선생도 살아 계셨고 밤늦도록 강의 준비와 평론에 몰두할 즈음이다. 휘적휘적 시인 고은 씨가 나타난 거다. 이봐, 윤식이 뭐 하노… 뭐하긴 ‘밥벌이’ 한다. 이놈아, 너는 밥벌이 하느라 당연히 힘들지만 나는 밥벌이 하려고 시를 쓰는 것도 아닌데 와이리 힘드나… 아이고, 이놈아 당연히 힘들지… 다 인간으로서 ‘통속’ 속에 살면 다 힘든 거다… 이리 와라. 소주나 한 잔하자. 그러면서 군용 철제 락커를 삐거덕거리면서 열고 마구 쌓여져 있는 식자체 누런 소설책과 원고 더미 속에서 소주를 꺼낸다… 그리고 군용 커피 잔에 나누어 마신다… 친구여, 내가 요즘 자주 말하는 통속(通俗)2의 의미가 바로 여기 있다.
예의, 배려, 대의명분, 애국심마저 점점 사라져가는 2006년 대한민국에서 현재 환자를 보는 모든 행위도 다 통속의 일부로 전락(轉落)하였다. 진료 자체는 정말 숭고하고 우리의 본분이지만 친구여, 전문 지식보다 인터넷이 강자성 지배 행위를 하는 현재, 우리의 본업 특성상, 진료로 이끌기 위한 과정에는 예전보다 어마어마한 통속이 숨겨져 있지 않은가?
바쁘게 진료를 하다가 신환이 오면 상담실로 간다. 좁은 상담실에 어마어마한 뿌아종3 냄새(사랑스러운(?) 환자들이여, 연애 중임은 내 이해하지만 상담실과 진료실에서만은 제발 향수만은 뿌리지 말아다오, 두 겹으로 고기능성(?) 필터마스크를 껴도 머리가 아프다오. 파트리크 쥐스킨트를 좋아하는 나지만 ‘향수’라는 책 제목 때문에 고개를 돌리는 나라오…), 어마어마한 헤어제품 냄새, 글로시한 립글로스로 무장한 짧은 치마의 20대 후반의 여성의 주소, 즉 돌출과 크라우딩을 해결하기 위하여 나는 열심히 설명한다. 각종 증례들을 보여주고 최신의 장치를 설명하고… 우리는 그래도 통속 속에만은 있지 않다고 부정하는 친구여, 그 환자가 저녁에 만날 애인을 위하여 향수를 뿌렸듯이 결국 우리는 그 환자를 attraction하기 위해서 다정다감을 가장한 설명을 뿌렸던 것이 아니었던가?
지역사회 구강보건 향상과 양질의 진료라는 형이상학이 이루어지기 위한 과정 속에 어쩔 수 없이 통속이 끼어든다는 내 말에 너무 분노만은 하지 말아다오. 그러나 이를 다 통속이라고 치부하면 너무 처절하다. 이렇게 하는 과정이 진료로 가기위한 필수불가결의 과정이고 나의 밥벌이이며 이런 밥벌이 과정은 또 인간이 사는데 있어서 정말 눈물이 나도록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4 우리가 아무리 치과대학 졸업 후 개업을 통하여 자아성취를 하고 또는 간혹 희열에 차서 강연장에서, 상아탑 등에서 자기존재 증명욕구를 만천하에 드러내며 뭘 하든 간에 진료 현장에서는 냉혹하지만 통속, 진료, 밥벌이가 계속된다.
아무튼 그런 거다. 그러면 우리는 이 건조한 상황에서 어떻게 버틸 것인가? 현 상황의 부조리함을 온몸으로 느끼며 애꿎은 감수성만 탓하며 우울해만 할 것인가? 여기 42세의 스기야마 쇼헤이5가 있다. 동경 교외에 멋진 집까지 마련한 그는 그러나 늘 무료하고 신나지 않다.
힘들지만 회사생활은 성실 그 자체였던 그는 어느 날, 여느 때와 다름없이 통근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차창을 통해 아름다운 여인 마이를 보고 호기심을 느끼고 사교댄스의 매력에 푹 빠져든다. 처음에는 마이에 대한 애틋함으로 시작한 춤이 점점 삶의 일부가 되고 무료한 일상에 에너지와 생기가 깃들기 시작한다. 물론 밥벌이의 근원인 직장 생활은 계속되지만 예전처럼 힘들지는 않다. 부조리하고 처절한 삶의 연속성이 어찌 보면 너무나 형이하학적일 수도 있는 사교춤(?)이라는 빛에 가려져 존재의 허무가 극적으로 극복되는 것이다.
무능하고 비효율적인 국정 운영의 미숙으로 오는 국민의 외면과 냉대에서 야기된 허무와 의기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