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힘으로
진주의 역사문화를
가꾸고 발전시켜 나가야
지난 1월 12일과 5월 19일 경남일보의 강동욱 기자가 진주대첩 ‘김시민장군 공신교서’가 일본미술관에 뺏길 위기가 있다는 기사와 5월 25일 중앙일보 김상진 기자가 쓴 정부 `절차 타령’하다 못 샀다 김시민 장군 임진란 `공신교서’ 일본서 경매 ‘보물급’일본인에 넘어갈 듯하다는 기사에다, 선조는 1604년 김시민을 선무(宣武) 2등 공신에 올리고 노비와 밭을 하사하는 교서(敎書)를 내렸다.
이 교서가 일제 때 일본인 학자에게 넘어갔다가 작년 말 도쿄 경매시장에서 고서적상에게 1천2백만엔에 낙찰되면서 모처럼 소재를 드러냈다.
진주정신의 상징 김시민 공신교서를 그대로 둘 진주 사람들이 아니다.
시민단체들이 모금운동을 벌이고 민속예술단체들도 모금공연에 나서 교서를 되사오기로 했다.
충절(忠節)의 고장, 예향(藝鄕)이자 문향(文鄕) 진주의 곧은 얼은 일본의 수중에 떨어진 김시민교서의 얄궂은 운명을 종내 바로잡으리라 믿는다는 5월 25일의 조선일보 ‘만물상’을 잇달아 접한 진주시민은 진주대첩의 역사기록인 김시민장군의 공신교서가 일본에서 100년에 가까운 유배를 끝내고 우리나라에 돌아와야 한다는 결심을 하는데 촉매역할을 하기에 이르렀고 그동안 이를 관망하면서 나는 시민운동으로 이를 찾아오리라는 결심을 굳히고 있었는데 뜻있는 시민과 회원들의 건의가 잇달아 이어지면서 나의 행동에 불을 붙이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1996년 6월 12일에 시민 스스로 진주정신으로 진주의 역사문화를 가꾸고 창달하기 위하여 진주문화사랑모임이라는 시민단체를 결성하는데 앞장서 100년 만에 진주시민의 정성어린 헌금 7천만원을 받아 망진산봉수대를 복원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사에서 유일무일한 걸인기생 독립만세운동 재현, 진주팔경 제정, 떠돌아다니던 형평사운동의 주역 신현수 선생의 공적비를 옮기는 등 진주의 크고 작은 역사문화진흥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연유로 이번에도 진주시민은 진주역사문화지킴이로서 내가 앞장서야 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었다.
김시민공신교서는 충렬의 상징이고 실제 진주대첩의 역사 흔적으로 참으로 우리가 걷어 들여야 할 귀한 역사기록 찾기의 대상이었다.
지난 역사를 상상만 해도 대단할 수밖에 없다.
1592년 진주대첩에서 불과 3800명으로 진주성을 사수하며 3만의 왜군을 무찌른 임진왜란에서 첫 승리는 진주정신 진주시민의 장한 나라사랑 나라지키기였으며 임진왜란에서 초기 늘 패패만 하던 우리군사와 백성들에게 사기를 높여 구국의 도화선이 된 계기를 만든 것이기도 하였다. 여기에는 김시민장군이라는 걸출한 지도자로서 훌륭한 덕목과 투철한 정신을 가춘 훌륭한 장군이 있었던 것이다.
1000년 고을 진주는 현재까지 뚜렷한 역사를 발굴하지 못하고 기록하지도 못해 빈 공간으로 남아 있는 우리의 역사유산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는 진주의 현실에 공신교서의 발견은 우리들에 나라사랑 이상의 충격을 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나의 제의로 모금운동을 시작하였으나 일본고적상에서 제시한 구매가격이 1억2천만원이며 구매기한이 한 달밖에 여유가 없어서 진주시민 단독으로 모금을 해 환수하느냐, MBC 느낌표! 74434팀과 공동으로 하느냐의 방법론으로 진주문화사랑모임의 회원 간에 격론이 벌어졌으나 결국 MBC와 공동으로 모금하여 환수하기로 결정하고 공동모금 한 달 10일만에 1억2천만원을 모금하여 7월 24일 현지에 가서 인수하여 중앙박물관에 안치 했다가 7월 25일 진주시민을 대표하여 서울에 올라 가 고유제를 지내고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특별전시 후 진주로 영구히 내려오는 쾌거를 이룬 것은 내 일평생에 가장 큰 역사문화의 수확이었다.
고유제란 나라의 큰일에 천지신명과 선조에게 제를 고하는 엄숙한 제례의식이다.
고유제를 거행하는 동안 불경스러운 일은 나는 전립선비대로 커피를 마신 점심이후에는 2시간~2시간 30분마다 생리적 작용을 해야 하는데 한낮 32도의 더운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