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가 올바르고
합목적인 진화를 이루려면
믿음과 나눔은
회복돼야 할 최우선 덕목
친구 놈은 딸이 하나 있다. 이름은 지민이. 예전에 집에 놀러가서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예쁠 것도 미울 것도 없는 그런 ‘보통’의 아이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인사성 바르고 엄마일도 곧잘 돕는 착하고 예절바르고 부지런한 아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친구의 아내가 그 딸이 제 앞가림을 잘 못한다고 걱정스러워 항상 안절부절이었다. 언젠가 저녁 모임 후 친구와 집이 같은 방향이라 함께 막힌 길 위에서 차안에 갇힌 중, 지민이 얘기가 나왔다. 학교에서 수학시험을 보았는데, 나눗셈과 분수를 응용하는 문제였단다. ‘피자 한판이 여섯쪽, 친구들은 다섯 명이 있는데 나머지한 쪽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라는 주관식문제의 지민이 답안 때문에 온 학교가 술렁였단다.
지민이의 답은 ‘더 먹고 싶은 친구를 주면 된다’ 였단다. 채점하시던 선생님은 배꼽을 잡으셨고, 다른 선생님들에게 이 말이 전해지며, 선생님들 사이에서 이 답안이 웃음거리가 아니라는 진지한 토론이 벌어졌고, 토론 중에 지민이 1학년 담임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단다. 2년전 수학수업 중에 아이들에게 질문을 했었단다. ‘엄마가 천원을 주시며 수퍼에 가서 칠백오십원짜리 간장을 사오라고 하셨어요. 거스름돈은 얼마를 받아와야 할까요?… 음… 정지민!’ 지민인 진지한 얼굴로 일어나 ‘수퍼아저씨께서 주시는대로 받아오면 됩니다’하고 앉더란다. 교실안은 웃다가 의자에서 굴러떨어진 아이들도 있을만큼 행복(?)했었던 사건이 있었다고 지민이 1학년 담임선생님은 회상하시더란다.
지민이는 ‘피자답안’ 이후 삼,사년 지난 중학교 1학년 때, 밴쿠버로 배움의 터전을 옮겼다. 지민이 엄마는 여기서 지민일 가르칠 자신이 없더란다. 필자는 꽉 막힌 강변북로위에서 생각했다. 지민이가 어리석고 못난 아이일까? 아니면 21세기 대한민국이 어리석은 걸까?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토록 힘들고 숨가쁜 까닭의 전부를 순간 알 것 만 같았다.
지민이는 우리사회 구성원들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하고, 그토록 우리사회가 목말라 부르짖는 ‘합리적 분배와 당연한 신뢰’에 대한 완전한 교육의 결과가 이미 구현되어있는 아이였다. “왜 상황판단 못하고 수학시간에 그런 답을 써? 바보같이… ” 라는 얘기를 하자는게 아니다. 지민이같은 아이가 전교에 한두명이고, 지민이같지 않은 아이가 대부분이면 지민이는 떠난다. 생존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지민이같은 아이가 대부분이고 지민이같지 않은 아이가 한반에 한, 두명이라면, 지민이같지 않은 아이는 지민이 같은 아이가 된다. 자신이 옳지 않음을 깨닫게 될터이고, 지민이같은 아이로 살아가는 것이 행복하다는 것을 알게 될테니까.
더 많이 가져야하고 더 높이 올라가야 함을 가르치는 가운데, 아이들은 지쳐버려 나눔과 신뢰라는 무게가 나가는 짐들은 버리고 간다. 그게 얼마나 중요한건지 알기도 전에 버리기 때문에 나중에 그것이 반드시 필요한 문제와 만나면 해결책을 찾지 못한다.
믿고 나누면 될 일을, 믿지 못해 셈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이룬 공동체는 시간과 재화를 믿음과 셈에 허비한다. 그것이 제도이던 조직이던 권력이던, 그것을 믿지못해 감시하고 통제하기위해 제도와 조직과 권력을 또 만들어내고, 평가하며 견제하는 악순환은 아무것도 해내지 못하는 마비된 채 숨만 쉬는 거대한 공룡같은 모양을 보여준다.
어느 나라나 의료보험제도는 애물단지다. 실패와 고통을 겪고 답을 찾은 나라도 있고, 조심스럽게 정답을 찾아간 나라도 있고, 다른 나라의 예를 그저 모방하는 나라도 있다.
얼마전 저녁뉴스에 대형병원 소아과에서 환자와 의사가 마주한 시간이 40초라고 취재보도된 적이 있다. 당국은 점차 개선되고 정비되어지고 있는 것이 우리건강보험의 현주소라고 하지만, 필자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매우 중요한 부분이 빠져있다. 나중에 찾으려해도 어디에서 빠뜨렸는지 찾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