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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레이수필(812)>
Mom! Can you hear me ?
어머니, 아들의 목소리가 들리십니까? (1)
안창택(연세치대 2회 졸업)

안창택 : 현재 미국Los Angeles 지역에서 개업 중 ※ 본글은 올해 어버이 날을 맞아 LA에 있는 교포방송국인 라디오 서울에 공모한 수기에서 1등으로 당선된 작품이다.
어머니가 태어나신 곳은 일제 시대에 일본 중 북부인 후쿠시마 지방이다. 평범한 목수의 4남 5녀 중에 세번째 딸로 자라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여 동경의 간호 전문학교를 나오셨고, 당시 일본에 유학 중이셨던 아버지를 만나 살고 계시던 중 해방이 됐다. 해방이 되면서 한국에 계신 할아버지의 완강한 권고로 아버지가 귀국하시는 바람에 어머니도 같이 낯선 외국인 한국, 제주도 땅을 밟게 돼 어머니의 한국 이민이 시작됐다. 전혀 한국말을 모르시고 문화와 관습이 모르셨던 한국 이민 초기의 어머니의 가슴 앓이는 어렸던 그당시 나는 전혀 몰랐다. 서툴게 한국말을 하시는 어머니께 발음이 잘못 됐다면서 오히려 아들인 내가 놀리곤 했다. 지금 내가 미국에서 서투른 영어를 할 때 내 아이들이 내게 놀리는 상황과 너무 닮아, 어렸을 때 어머니께 놀렸던 그 벌을 이젠 내가 아이들에게서 놀림을 받는 것은 인과응보이고, 어쩌면 어머니께 놀렸던 대가를 내 아이들에게서 지금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인 지도 모른다. 내가 5살 정도였을 때에 어머니의 오라버니가 돌아가시고, 어머니의 여동생이 먼저 저 세상으로 가셨는데도, 일본으로 가실 여비가 없으셔서 눈물로 지내셨던 어머니의 가슴 아팠던 사연은 지금도 내 기억 속에 또렷하게 남아 있다. 그 시절에 농사 지을 때에는 거름이 모자라서 돼지우리에서 나오는 냄새가 아주 고약한 오물이 자동적으로 거름이 됐고, 요강에서 나오는 소변도 일부러 썩혀서 거름을 만들었다. 어머니도 예외일 수 없으셔서 처녀 적에 해 본적도 없는 오물과 돼지의 똥거름을 등에 지시고 밭으로 가셔야만 했다. 어려운 이민 생활이면서도 한국에 사시려면 한국말을 배우셔야 되겠다는 마음에서 밤에는 동네 가운데에 있는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를 나와 똑같이 배우셨다. 성인이 다 되어서 외국말을 배운다는 것이 여간 어렵지 않다는 것은 여기 사시는 모든 미국 이민자들이 느끼는 공통점이기 때문에 어머니께서 말을 늦게 배우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던 것인 줄 충분히 짐작이 가는 것이다. 어떻든 간단한 말과 글을 배우셨지만 지식 습득이 어려웠고 뉴스나 기타 소식을 듣기가 어려우셨던 것으로 짐작이 된다. 그래서 인편을 통하여 일본 잡지를 구입해서 보시면서 정보에 대한 갈증을 푸신 것으로 유추 할 수 있다. 그런 일본 잡지를 보시는 모습이 내가 겪었던 어린 시절에 봐 왔던 어머니의 유일한 독서였다. 그런 것으로 어머니의 향수병을 이겨 나가고 계셨던 것을 나도 똑같이 미국에서 신문이나 잡지로 어머니께서 하셨던 것을 반복하고 있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지금 우리가 미국에서 한국 TV나 신문 라디오로 고국의 소식을 접하는 것이 얼마나 축복 받는 일이고 미국에 와있는 우리에게 언론 매체가 주는 고마움도 이 글을 통하여 감사 드리고 싶다. 어머니의 귀가 약간 트이시고 글자가 익숙하실 무렵에 아버지가 타인의 빚 보증으로 우리집 경제 사정은 급속도로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은행에서 아버지의 직장에 차압이 들어와 아버지의 거의 모든 수입이 은행으로 들어가게 됐다. 그때까지 그럭저럭 살아가던 우리집 경제 사정은 하루아침에 곤두박질 치고 말았고, 내가 중학교 2학년, 형들이 고등학교, 내 밑으로 초등학교 다니는 두 여동생, 이렇게 5남매에게 학비 걱정은 차라리 사치스러운 걱정이고 그날 먹을 쌀이 문제였다. 어머니는 한 입이라도 덜어보시려는 마음에 큰 결심을 하시게 됐다. 아버지의 빚 보증의 시달림에서 조금이라도 덜어드리려고 초등학교 1년인 막네만 데리고 일본으로 다시 역 이민을 가셨다. 아마도 빚 보증의 어려움으로 살기 어려운 타국보다는 의사 소통이 원활하고, 그래도 경제 사정이 좋고, 고향이 기다리고, 형제 자매가 있는 고국이 더 사시기가 편하리라 생각하셨는 지도 모른다. 덤으로 일본에서 몇 푼이라도 벌어 남아있는 자식들의 학비도 보탤 겸 떠나기로 하셨다. 나는 졸지에 어머니를 잃은 반쪽 고아가 됐고 그때부터 어머니의 그리움은 싹트기 시작했다. 중고등학교 때 나는 친구 집에 가는 것이 무척 싫었었다. 내 친구들에게는 언제나 아들을 반겨주시는 어머니가 계셨다. 아들 친구들이 오면 부침개도 부쳐주시고 미역국을 생선과 곁들여 한 사발씩 퍼 주시면서 나를 꼭 본인의 아들처럼 대해 주셨다. 나는 집에서 별로 끓여 주는 사람도 없어 따뜻한 국 한그릇 먹어 보고 싶었지만, 친구 집에 가면 친구의 어머니를 통하여 또 나의 어머니 생각이 다시 날까봐 일부러 피한 적도 있었다. 어쩌다 갈 때는 청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