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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1)백살 할아버지/김현기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은
뒤를 돌아보는 법이다
인생만큼 먼 길이 어디있겠는가

 

지루한 장마가 끝나고 땡볕 무더위가 시작됐다. 환자들을 정신없이 진료하고 있으면 등줄기에서 땀이 흠씬 흘러내린다. 이무렵쯤이면 무더위만큼나 힘들었던 인턴시절 절대 잊을 수 없는 할아버지 한 분이 떠오른다. 


병원은 환자들로 넘쳐날 정도로 분주했다. 호명과 함께 등장한 할아버지의 범상치 않은 출현은 주변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삿갓에 도포를 두르고 지팡이에 온 몸을 의지하며 겨우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 놀란 것은 할아버지의 연세였다. 출생년도 1901년, 그 해로 정확히 100세…. 하지만 할아버지는 보호자 없이 혼자 병원에 오실 정도로 정정하셨다. 
치수검사을 위해 할아버지의 틀니를 빼고 이런 저런 검사를 하던 중에 장난끼가 발동하여 대뜸 질문을 드려보았다.


“할아버지, 혹시 관순이 누나 알아요?"
“엥, 누구 말이여? 관순이가 뉘귀여?"
“아 왜 유관순 누나 있잖아요…. 삼일운동 때 만세운동한 유관순 누나요."
“도통 뭔소린지… 내가 아는 사람이여? 유관순이 나 몰라."
“할아버지 그럼 삼일운동은 기억하세요?"
“그 때 너나없이 만세부르면서 정신없이 뛰어다녔지… 만세운동 때문에 일본놈들 혼구멍이 좀 났을거여."


진료를 마치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유관순은 몰라도 만세운동만큼은 당당하셨던 할아버지의 지팡이는 갈 길을 재촉하였지만 걸음걸이는 여전히 나무늘보였다. 몸은 세월의 풍파를 못 이겨 지팡이를 의지할 정도로 노쇠하였지만 만세운동 때의 그 당당했던 기백만큼은 여전하였다. 하지만 다시는 마주 대할 수 없는 지난 세월의 흔적이 저만치 느릿느릿하게 흘러가는 것 같아서 가슴 한켠이 짠하였다.


백살 할아버지와의 멋진 만남 이후로 가끔 지난 시간을 뒤돌아보곤 한다.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은 뒤를 돌아보는 법이란다. 우리들 인생만큼이나 먼 길이 어디 있겠는가 ? 빠름에 익숙하지 않고, 느릿느릿한 걸음걸이로 매순간을 의미있게 호명하며 삶의 진중한 가치를 소중히 실현시켜 나가는 그런 삶이길 소망해 본다.
백살 할아버지의 느릿느릿한 세월에서 흘러내린 당당한 옛 선비의 기품이 한 없이 그리운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