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편한 공간
이젠 집보다 더 편안한 곳
병원이 곧 내가 있어야 할 공간
우리 집은 분당이다.
병원은 인천이다.
병원에서 집까지의 거리는 50킬로미터다.
집을 나와 병원 원장실까지 가는데 걸리는 시간은 평균 1시간 10분이다.
핸드폰의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언제부터인가 주변에 자명종 시계는 자취를 감추고 핸드폰의 알람 소리가 그 자리를 대신해 왔다. 눈을 뜨고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본다. 오늘도 비가 많이 오는구나.
난 원래 비를 좋아한다. 하지만 출근길의 비는 영 반갑지가 않다. 그래도 다른 날보다 서둘러 일찍 출발했다. 아파트 입구를 나오자 마자 거대한 주차장이 되어버린 도로가 나를 맞는다.
겨우겨우 주차장이 된 도로를 빠져 나와 고속도로로 접어드니 이젠 그래도 달릴만 하다. 그러나 세차게 내리는 비 때문에 와이퍼를 아무리 빨리 작동시켜도 시계가 좋지 않다. 평소보다 느린 속도로 달리면서 시계를 본다. 오늘은 아무래도 제시간에 도착하긴 힘들겠군.
매일 하루에 두 시간씩 일년이면 700시간 정도를 나는 출퇴근에 소비한다. 본래 미묘한 숫자놀이에 흥미가 있다 보니 이런 계산을 자주 하게 된다. 애들 교육을 주장하는 마나님 때문에 분당으로 이사 온지 어느새 5년, 그 동안 나는 3500시간을 출퇴근에 소비했다. 과연 내가 죽을 때까지 나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출퇴근에 소비하게 될까?
그래도 그 시간을 활용하기 위해 그 동안 영어공부 테이프를 듣기도 하고 지금은 플래너를 확인하며 오늘 할 일들을 다시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곤 한다. 요즘 들어 점점 뭔가를 잊어먹는 일이 자주 생겨 부득불 자주 기록하는 습관을 들인다. 그것도 자주 하다 보면 재미가 생긴다.
그래도 오늘은 이렇게 비가 오니 어딘가 도망가고 싶은 생각은 나지 않는다. 때때로 정말 드물게 일년에 서너 번 정도 시리도록 푸른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출근길 하늘에 펼쳐질 때가 있다. 그럴 때 마다 난 탈출을 꿈꾼다. 언제나 꿈꾸기만 하는 것이 탈이지만… 이대로 차를 돌려 동해 바닷가나 보고 올까. 하지만 언제나 생각만으로 끝나는 나의 출근길 탈출기일뿐이다.
조남 분기점에 가까워지자 차가 꽉 막혀 있다. 역시나 오늘도… 출근길 최고 사고 다발지역. 특히나 이렇게 비 오는 날은 자주 사고가 생겨 출근길을 더디게 한다. 차를 달리지 못하니 답답하다. 그래서 평소처럼 엠피3 플레이어를 꺼내 들고 음악을 듣는다. 요즘 들어 부쩍 음악을 듣는 시간이 늘어났다. 환자들, 그리고 주변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지쳐버린 나에게 유일한 단절의 시간을 주는 친구가 되어버린 지 어느새 오래다. 노래를 들으며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해본다. 경기 때문인지 몇년동안 늘어나지 않는 수입, 자꾸 늘어나는 경비, 때로는 아들놈 공부에 대한 생각, 마나님 비위를 맞추는 생각, 노후에 대한 불안감, 어느새 노후를 생각해야 되는 나이가 되어버린 것에 대한 생각, 지지부진한 환자의 치료에 대한 걱정, 귀찮게 다가오는 관공서와의 관계, 홀로 외로이 차 속에 단절되어 있으면서도 난 결국 주변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진 못하고 있다.
사고지역을 지나니 비로소 속도를 낸다. 고속도로가 끝나고 인천시내로 접어드니 내리던 비가 이젠 주춤한다.
10차선 대로 중간에 종이박스를 가득 싫은 리어커를 끌고 할머니 한 분이 서 계신다. 은은한 아픔의 감정이 마음속에 자리잡는다.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너무나 상투적이지만 감상적인 생각에 사로 잡히지만 그래도 그냥 그렇게 지나친다. 이젠 뭔가에 감동할만한 일이 별로 생기질 않는다. 언제나 똑 같은 하루 별로 달라질 것이 없는 나이가 되어 버린 것이 서글프다. 소소한 작은 일에서 행복과 즐거움, 감동을 얻기 위해 노력해 보지만 그다지 쉽지가 않다. 역시 비 오는 날의 출근길은 상당히 감상적이 되어 버린다.
오늘은 결국 한 시간 반이 넘게 걸렸다. 지각이다. 병원문을 밀치며 내 직장에 들어선다. 별로 오고 싶은 곳은 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