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공감하고 호흡하며
열정적인 땀을 흘리며
시합하는 그 순간이 소중하다
둥그런 공만 보면 앞뒤 안 가리고 던지고 깨고 두드리던 한 꼬마녀석이 있었다.
어릴 적 초등학교도 가기 전부터 고무공을 가지고 동네에서 야구랍시고 들이대던 그 녀석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으로 반 친구 녀석들과 야구부라는 것을 만들어서 (7명 뿐이었다) 다른 반 아이들과 시합이라는 것을 하기 시작했다. 공도 고무공이 아닌 단단한 공으로… 포수 마스크도 없이 다치기도 많이 다쳤지만 이 녀석들은 지칠 줄을 몰랐고, 어둠이 내릴 때 까지 시합에 몰두하기 일쑤였다. 패배를 몰랐던 독수리 야구단. 마치 하늘을 날며 지구를 지키는 독수리 5형제가 된 기분이었다.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1982년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 프로야구가 탄생한 최초 원년(元年)이기 때문이다. 그해 각 도시의 야구장을 수놓던 OB와 삼성, 해태와 MBC, 롯데와 삼미의 펄럭이던 깃발과, 3루를 힘차게 돌아 귀환하던 선수들, 높은 포물선을 그리며 담장을 넘어오던 파울 볼과, 숨 죽여 가며 지켜보던 불펜의 피칭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환상적인 신세계였다. 그날로 난 해태타이거즈의 초대 어린이회원이 되었으며, 아저씨들 틈에 끼어 관광버스를 타고 광주를 오가며 무등경기장을 찾곤 했었다.
한 꼬마녀석의 야구를 향한 날갯짓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중3때 드디어 여수 시민체전에 우리 학교 야구부 선수로 첫 출전하게 되었다. 물론 급조된 야구부였으며, 들러리 출전이었다. 그나마 체육선생님을 졸라서 겨우 시합에 나갈 수 있었다. 명문 야구학교인 여수중학교 야구부와의 첫 게임에서 줄줄이 삼진을 먹고 들어오는 선수들을 보며, 독한 마음으로 타석에 들어서서 기습번트를 대고는 죽어라고 일루로 뛰어 들어가다 일루수와 충돌하여 바로 교체됐던 아픈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하지만 그날의 경험은 내 야구 인생의 위대한 한 페이지가 되었다.
고등학교 시절은 사합오락(四合五落)의 치열한 입시의 시대였기에 선생님 몰래 이어폰으로 한국시리즈를 응원하면서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대는 그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재수를 하게 되었다.
전남대 치과대학에 진학했다.
사진도 찍고, 밴드를 결성해 음악도 하고, 재미있는 일이 참 많기도 했다.
하지만 야구가 없는 내 인생은 식초를 넣지 않은 냉면을 먹는 맛이었다.
결국 동기 몇몇이 의기투합하여 야구부를 창단하고야 말았다.
금새 멤버는 불어났고, 주말마다 빈 운동장을 찾아 녹초가 되도록 훈련을 했고, 조선치대, 의대 야구부와 친선경기도 가졌다. 항상 팽팽한 경기였지만, 결과는 늘 패배였다. 아쉬웠지만 즐거웠다. 결국 모회사 축구팀과의 경기에서 1승을 거두었다. 너무도 값진 1승 이었다.
시간이 흘러 개원을 하게 되었고, 병원 일에 치여 살다 보니 정작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잊은 채 무력감에 젖어 있었다. 골프에도 취미를 가져보려 했지만 야구 스윙에 익숙해진 나는 별 재미를 못 붙이고 전전긍긍할 뿐이었다.(지금 야구부 코치는 나에게 골프스윙을 하려 한다고 야단이다) 그러던 중 사회인 야구단에 가입을 하게 되었다. 실력들이 장난이 아니었다. 체계적인 훈련으로 단련된 그 팀에서 결국 나는 팀 닥터를 맡는데 만족해야 했다. 오래지 않아 탈퇴하고 말았다. 시합을 못 뛰는 선수는 흥미를 잃기 마련이었으니까.
아쉬운 대로 10살짜리 아들 하규녀석과 동네 운동장에서 캐치볼이나 하며 애들 야구시합 심판 보는 정도로 만족하며 지내던 어느 날, 치과의사협회 게시판에 한국치과야구위원회라는 글자가 번쩍하고 눈에 띠었다. 뭔가에 감전된 기분을 느끼며 카페의 문을 두드렸다. ‘바로 이거다’ 싶었다. 야구에 목말라 있는 나와 같은 치과인들이 야구팀을 결성하고자 이제 막 기지개를 켜려는 순간이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약 두 달, 정말 많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모여들었다. 한때는 적이었던 조선치대 야구부 멤버들도 이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