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킨다는 것 보다
선배로서 먼저 안 것에 대해
후배들과 같이 나누고 싶다
어릴적 내 꿈은 야무지게도 한국의 페스탈로찌가 되는 것이였고, 꿈을 좀 더 현실적으로 갖게 되었을 때에 나는 중·고등학교 음악선생이 되길 희망하였다.
지금 나는 참 행복하게도 음악선생은 아니지만 내 어릴적 꿈인 선생노릇을 하고 있고, 벌써 16년째에 접어들고 있다.
그동안 2000명이 넘는 제자를 가지게 되었고, 병원 방문을 하다보면 “교수님, 저 누구예요”하며 달려와 반가이 인사하는 제자들을 심심찮게 만나게 된다.
초임교수시절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쏟아놓으려 했고, 학생들이 이해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욕심이 넘쳐 기대에 어긋난 학생에게는 눈물 나도록 야단을 쳤고 칭찬은 지독히도 인색하였으며 원칙을 중요시하고 예외를 별로 인정하지 않았다. 아이들의 다양성에 대한 인정보다는 내 방식대로 끌고 가려했고 특히 환자를 대하는 직업이기 때문에 작은 실수나 흐트러짐을 용납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늘 학생들에게 무섭고 카리스마 있는 교수라는 평가를 받곤 하였다.
이런 나에게 춤추는 것이 학과 공부보다도 좋았던 한 학생과의 만남은 나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 아이는 복장부터가 치위생과에 어울리지 않았고, 행동도 튀는 아이였다. 물론 이런 생각은 순전히 기성세대인 나의 생각이였고, 동료학생들에게 있어 그 아이는 우상이였다. 학교 축제가 있던 날 그 아이는 멋들어진 공연을 펼쳤고 교내에서 그 아이는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 내가 보아도 그 아이는 춤을 추는 동안 너무나도 멋지고 행복해 보였다. 그 아이에게 춤은 자기의 존재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였고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돌파구였다. 이런 다양한 끼와 특성을 갖고 있는 아이들에게 무조건 따라오도록 하는 것은 오히려 학과 공부에 흥미를 잃게 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고, 많은 것을 쏟아놓기 보다는 정말 필요한 것을 전해주기위해 고심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잘못을 지적할 때도 먼저 칭찬을 하고 지적은 나중에 하였으며 칭찬할 거리가 없는 아이에게도 칭찬할 거리를 찾으려 노력했다.
이런 변화 덕분에 학과에 적응 못하고 자신감이 없었던 아이에게도 “너는 인상도 좋고 성격도 좋아서 병원에 가면 정말 사랑받고 훌륭한 치과위생사가 될거야”라고 격려의 말을 자연스럽게 건넬 수 있었다.
졸업 한 그 아이로부터 “교수님, 정말 감사합니다. 교수님 말씀 덕분에 학과에 적응할 수 있었고, 지금은 치과에서 칭찬받고 있어요”라는 감사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
요즈음 초임시절 나를 기억하는 제자들을 만나면 “어머 교수님 넘 변하셨어요. 예전의 한 칼(?)있으마는 어디에…”하는 우스개 소리를 듣곤 한다.
나는 선생이라는 나의 직업을 사랑하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국어사전에 선생님에 대한 정의를 살펴보면 가르키는 사람이라고 풀이되어 있다. 그런데 가르킨다라는 말은 지극히 일방적이고 교수자 위주의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르킨다는 것보다 선배로서 먼저 안 것에 대해 나누고 후배들이 기대고 쉬어갈 수 있는 그루터기가 되어줄 수 있기를 바래본다.
부족한 나에게 ‘닮고 싶은 분과 함께 있어 행복하다’며 선생이라는 직업에 대해 보람을 느끼게 해주었던 고마운 글을 잊지 않으며 늘 열린 마음과 진정으로 대하는 선생이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