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기억해 보면, 유년의 마당은 풍요로웠던 듯 싶다.
여름방학식을 했다며 치료실로 몰려든 아이들 얼굴이 밝다.
10년전엔 나도 여름방학이 있었다. 그 긴 여름방학이 너무 무료해서 주체 못할 정도였는데. 내젊음이 웅덩이에 고인 물처럼 그렇게 정체해 있어서 두렵기까지 했는데... 그 긴 휴식이 있던 시절 난 무얼 했었지? 먼지 낀 일기장을 들쑤시다가, 아 발견했구나.
늦잠이 허락되었으면... 하는 일요일 아침부터 엄마의 성화에 잠이 깼다. 벽시계보다는, 창 밖으로 훤하게 터 오른 아침해가 그래도 내 억울함을 좀 삭여 주는 듯 하다. 일곱 시도 채 안된 시각. 주말의 명화, 그 후로 독서, 이어지는 생각들.
부모님의 코고는 소리 한참 후에 뒤척뒤척 잠이 들었건만... 용납되지 않는 아침이다. 아빤 “원 젊은애가 그렇게 게을러서...”로 시작되는 일장훈시와 함께 덧붙여 마당잡초를 뽑으라신다. 제초제 운운하는 아빤 내게 계속 “게으름...”으로 일관되어 공격해 오시고, 반쯤 뜨인 눈으로 비닐주머니를 집어들었다.
성년이 여덟인 가족 중에 유독 아빠 한 분만이 아파트가 싫으신 게다. 그리고 그 아버지의 뜻에 일곱이 큰 반란 없이 꼬박 순종하는 것도 신비로운 일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세대차가 극복되는 것 같던 아침이었는데.
아빤 다 늙으신 요즘에 춤 연습에 한창이시다. 트로트, 뽕짝에 맞추어서 춤선생(동네아주머니)께 과외를 받으신다. 아침, 저녁 짬짬이 복습에도 철저하시다. 아버지에게 있어서 춤은 쾌락적인 요소보다는 일종의 운동이다.
우리시대의 에어로빅 정도로 난 이해했다. 걷기 외엔 운동이 없으신 아빠에게는 생애 최초의 운동인 셈이리라. 다리가 덜 쑤신다는 아빠의 말씀에 난 거뜬히 트로트의 그 퇴폐적(?) 음향을 이해 할 수 있었는데...
부엌 창문을 통해 보이는 아파트 건설현장이 이젠 5층을 다 올리고, 입주가 낼 모래부터다. 그 아파트에 입주가 시작되면, 우리 집의 모든 사생활은 끝이다. 아무리 이십여년 전 아빠의 손으로 직접 지었다는 애정 담긴 집이긴 하지만, 변변히 여름샤워조차 허락되지 않는 이 집이, 아빠를 제외한 우리 모두는 싫은 것이다.
내 착찹함은 안중에도 없으신 듯 아빤 식사후 신문을 보시다 이내 잠드신다. 엄만 오늘도 집 뒤 아파트 신축현장의 모델하우스에 구경을 가실 것이다. 매미소리만 뜨겁게 울어대는 아침, 난 덜그럭 덜그럭 설거지를 했다.
고등학생이 되면서부터 집을 떠나왔기 때문에 부모님의 방학소집령은 막강했다. 본과 3학년 여름방학이었다. 나는 잡초 많은 마당이 싫었다. 날벌레, 모기의 은신처가 되기도 했던 마당의 이런저런 나무도 싫었던 것 같다.
하지만 기억해 보면, 유년의 마당은 풍요로웠던 듯 싶다. 수돗가의 대추나무, 그 밑으로 딸기가 조금 있었고, 담을 둘러 너울너울 가지를 뻗던 포도나무, 그 사이사이 백장미, 붉은나무, 수국, 화장실 앞의 밤나무와 감나무, 동네 개울물이 돌아나가던 양어장, 길가 담 너머로 휘어지던 앵두나무의 가지, 그 밑으로 키 작던 사철나무와 철쭉. 그리고 잊지 못할 회초리나무. 포플러인지 플라타너스인지 구별은 안되었지만, 우리집 멍구와 마당을 가로지르던 빨래줄이 묶여있던 이 나무는, 종종 그 가지를 잘라다 회초리를 드시는 아빠로 인해 나와 내 동생에게는 두려움이었다.
여섯 남매가 자라온 그 마당은 하나씩 그 아이들이 도시로 떠나게 되면서 늙어가기 시작했다. 양어장이 메워지고, 읍사무소가 들어오면서 포도 넝쿨 있던 담이 헐리고, 신작로에 아스팔트가 깔리면서 도로가 넓어지는 만큼, 우리 집은 뒤로 서른 발자국 물러나야 했다.
넓던 마당이 좁아지고, 아버지는 더 이상 마당을 돌보실 시간이 없었으리라.
해마다, 고등학생, 대학생이 되는 우리를 위해, 아버지는 새벽밥을 드셔야 했다. 다섯 번째인 내가 본과 3학년이 되었을 땐, 마당은 이미 검버섯이 핀 아버지의 얼굴과 닯아 있었다.
오래도록 마당을 지켜오신 아버지가 지금은 그때 그 아파트의 살고 계신다. 우리집 마당을 지나는 도로 계획이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지 않는 그 마당에, 이제 잡초를 걱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