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크기는 변하는 것 같다
어릴때 가운은 멋있어 보였고
이제는 피곤하고 힘들어 보이는
얼굴의 주름은 왜소하게 느껴져
2008년 3월 15일. 아침출근부터 여러 가지 고민에 빠진다. 어떤 복장을 해야 하나? 마산입문이후 이사에 선출되고 대의원자격으로 경남 대의원총회에 처음 참석하게 된 날이다. 많은 선배님들 앞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야하나? 환자를 보면서도 노트북 앞에서 연신 마우스 클릭을 해대면서도 계속되는 생각들….
“어디서 많이 보던 총각이네!” 하얀 가운을 걸친 유난히도 커 보이던 아버지께서 초등학교시절 구강검진을 와서는 날 보며 하신 첫 말씀. 아버지는 본관과 강당을 이어주던 지붕 덮힌 도로에서 책상과 의자를 놓고 검진을 하고 계셨다. 내 순서가 올 때까지 약간 긴장도 되고 자랑스러운 맘도 함께 있었던 순간이었다.
흔들리는 치아를 걱정하며 나에게 문의하는 반 친구들을 데리고 병원으로 가면 아버지는 “이건 공짜다”하시면서 가끔 군것질 비를 살짝 주시기도 하셨다.
그렇게 초등학교 시절이 지나가고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새로운 부담과 고민의 사춘기가 다가왔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위의 사람들은 당연히 내가 치과의사가 되는 길을 가리라고 생각했고, 그 길이 쉽지만은 않았기에 많이 방황하며 힘들었던 시절이 있었다.
다시 돌아온 진주. 그 곳에서 나는 개원하신지 40년이 지난 대선배님과의 공동개원을 준비하였다. 그 분은 다름 아닌 아버지. 기존의 1층 진료실을 2층까지 확장하고 신과 구가 공존하는 멋진 갤러리 같은 병원을 차근차근 만들어나갔다. 건축을 전공한 사촌동생의 도움을 받아 당시에는 조금 앞선 느낌의 심플함이 돋보이는 새로운 공간을 만들었다. 그때만 해도 지금까지 내가 자라왔던 것처럼 파란 하늘 위에 군데군데 뭉게구름이 떠있는 기분 좋은 밝은 미래만 꿈꾸고 있었다. 하지만 오랜 객지 생활후의 고향은 익숙한 듯 낯설었고 기존 환자들은 두 의사에 대해서 큰 신뢰의 차이를 보였기 때문에 나에게는 쉽지만은 않은 현실들이 숙제와 부담으로 다가왔다.
답답한 현실 때문이었을까? 나름대로 진주에서의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고자 하는 노력의 하나로 그 동안 꿈꿔왔던 밴드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렇게 낮에는 병원에서 밤에는 합주실이나 공연장에서 시간을 보내며 하루하루 한 달 몇 해를 아버지와 한 공간에서 일을 했다. 예술에 대한 이해가 남달랐던 분이라 2002년 월드컵 4강 진출 확정 후 갑자기 시행한 거리공연에 가운을 벗어던지고 나가도 그냥 웃으셨고, 개천예술제 야외무대에서 공연을 하고 있으면 무대 바로 앞에서 셔터를 연신 누르고 계셨다.
다시 시작한 마산에서의 개원. 타향에서의 새로운 시작은 적잖은 부담감과 긴장감을 동반한 생활이었다. 기존의 병원을 인수하여 나의 이미지를 심고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리라는 결심을 매일 다지며 지냈다. 가까이 계신 선배님의 도움으로 테니스 모임을 다니며 주위의 좋은 선배님들과 친목을 다지며 지내기를 2년여 이제는 마산시 치과의사협회 이사가 되었고 대의원총회에까지 참석하게 되었다.
라이온스, 사진협회, 진주사랑모임, 환경모임, 진주축구협회, 진주예총 등등…. 너무 많은 사회활동 덕분에 가족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하는 것이 아버지에 대한 어린 나의 불만이었다. 그런 아이가 성장하여 같은 직업을 가지고 예전에 당신께서 하셨을 고민, 시행착오 등을 따르며 이제는 집단에서의 중심 인원이 되어 바빠지고 있는 것을 발견하곤 나도 모르게 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것에 놀랐다.
부모의 크기는 변하는 것 같다. 어릴 때 가운은 길고 멋있는 것이었고, 친구의 죽음 앞에 눈물짓는 어깨는 낮아 보이고, 이제는 피곤하고 힘들어 보이는 얼굴의 주름은 왜소하게만 느껴진다.
부모와 자식 간은 가깝지만 넘기 어려운 장벽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지금 아버지 당신이 지나간 발자국을 따라 인생을 살고 있는 아이는 그 담벼락을 타고 이쪽저쪽을 조용히 쳐다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