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후. 오늘은 평소보다 2시간 정도 진료를 일찍 마치고 병원을 나섰다. 성남 아트센타로 가는 길은 주말인지라 길이 많이 막혔는데 여느 때 같으면 짜증스러웠을 이 길이 오늘은 마냥 설레기만 하다.
벤쿠버 심포니오케스트라와 힐러리 한의 협연을 보러 가는 날이다. 내가 이렇게 가끔 실내공간을 벗어나 연주회장을 찾은 계기가 된 것은 60년대 후반 중학교 시절 고향 빛고을에서 당시 서울음대 교수였던 양해엽 씨의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 서울시향과의 협연을 보고 난 후부터이다.
아껴뒀던 돼지저금통을 깨고 찾아간 그 날의 연주는 커다란 충격과 감동을 주었고 두고두고 내 삶에 큰 영향을 끼쳤었다.
당시에는 서울시향의 연주를 지방에서 듣는 것도 드물었었고 물론 서울에서도 정상급의 연주자는 거의 만나지 못할 만큼 어렵던 시절이었다.
오늘 내가 듣고 싶어하는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내가 이 곡을 처음 접한 건 중학교 1학년 때이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당시 전국에서 서울 중앙여고와 함께 관현악단이 있던 유일한 남학교였다.
관현악단을 지도하시던 선생님께서 완행열차를 타고 1박 2일의 긴(?) 여정 끝에 가방 속에 숨겨간 녹음기로 몰래 녹음해 왔던 곡. 정경화 씨의 첫 내한 공연이었던 이 곡을 단원 모두는 쥐죽은 듯 조용히 감상했었다.
그 후 프랑크푸르트 ‘오퍼"에서 연주회장에서는 처음으로 이 곡을 들었었다.
‘힐러리 한", 안나소피에 무터 이 후 떠오르는 여류 바이올린이스트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그녀의 연주. 하이페츠의 강렬함이나 정경화의 신들린듯한 연주에 익숙해 있던 나에게 그녀의 1악장은 곡흐름의 속도나 힘에 있어서 조금은 아쉬움을 줬고 1악장이 끝나고 박수치는 사람들이 있어 2악장에 몰입하는데 약간 방해를 받았지만, 정적인 그녀의 연주는 2악장에선 빛을 발했었다.
슬프도록 아름다운 2악장의 주제 선율은 감수성이 예민하던 사춘기 시절 쇼팡의 에튀드10-3번과 함께 가끔 가슴을 적시기도 했던 적이 있었다.
이날의 마지막 곡은 브람웰 토비가 이끄는 벤쿠버 심포니의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 이따금 파트간의 엇박자가 느껴지는 곳이 있고 조금 거친 금관악기를 제외하면 기대 이상으로 좋은 연주였고 특히 5악장의 폭발적인 연주는 어느 정상급의 교향악단에 못지 않았다.
올 한 해의 끝자락 12월말에는 ‘랑랑"이라는 피아니스트의 리사이틀을 찾아볼까 한다.
몇 년 전 한국에 처음 선보인 적이 있는 그가 올해는 두 번 째로 한국을 방문한다. 중국이 베이징올림픽에서 자랑스럽게 내세웠던 중국 토종 출신의 이 젊은 피아니스트가 지금 중국 전역을 열광(?)시키고 있는 것은 약간의 콤플렉스가 작용한 탓도 있을 것이다.
내가 이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처음 들은 곳은 몇 년 전 늦가을에 방랑병이 도져 훌쩍 떠난 유럽여행길 비행기 안에서였다. 그의 연주는 동양인으로서 러시아 음악의 정서를 거의 완벽하게 소화해낸 경이로움 같은 것이었다. 젊은 시절의 호로비츠 같다고나 할까 물론 그가 과거 냉전시절 차이콥스키 음악제를 우승하고 돌아와 전 뉴욕 시민들의 환호를 받았던 ‘반 크라이번" 처럼 반짝하고 사라질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현재 그는 최정상급 연주자임에 틀림없고 직접 연주의 호흡을 느껴보고 싶은 마음이다.
오늘은 문득 내가 이렇게 일상에서 뛰어난 연주들을 가까이 접할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행복감을 느낀다. 앞으로 사는 동안 똑같은 곡의 수준 높은 연주를 다시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해본다.
훌륭한 시설의 성남 아트센타를 뒤로하고 돌아오는 길에 분당 정자동 카페에서 와인 몇 잔에 취해 나는 여러 상념에 잠겼었다.
다른 어떤 예술보다도 아무런 여과없이 곧바로 우리의 영혼을 파고드는 특성을 지닌 음악. 좋아하는 음악은 어느 장소에서든 나 자신을 혼자만의 공간안에 빠져들게 한다.
돌이켜 보면 음악은 어린 시절부터 장년의 끝자락인 지금에 이르기까지 내 삶의 슬픔과 기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