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봄, 지인의 권유로 DSLR에 입문했다. 사실 여기저기 여행을 다니면서 좋은 경치를 보고도 담아오지 못하는 아쉬움에 DSLR에 대한 관심이 있었던 차 이었다. 거금을 투자하여 이것저것 장비를 마련하고 출사라고 다니기 시작한 것이 지난 3월이다.
하지만 출사는 항상 골프에 밀려 라운딩 전이나 후 짜투리 시간에만 이루어졌다.
8년차 기러기로 남는 시간 골프에 정진하다보니 꽤나 성적이 좋아 여기저기 다른 멤버들과의 라운딩이 한달 일정으로 잡혀 있곤 하던 때이니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야생화의 매력에 빠져들게 되었다.
점점 생활의 축이 골프에서 야생화로 이동하고 급기야 일요일 라운딩 횟수가 줄어들기 시작하고 여름에 들어서면서 부터는 일요일 라운딩이 없어졌다.
어릴 적 수 없이 보아왔던 꽃들이지만 앵글에 담겨진 야생화는 더욱 아름답게 내게 다가온다. 나리꽃, 며느리밑씻개, 물봉선, 양지꽃, 바위채송화….
수 많은 정겨운 우리 꽃들을 담으면서 점점 야생화의 세계에 나도 모르게 깊게 빠져들게 되었다. 야생화클럽에서 어릴 적 보지 못했던 예쁜 꽃을 보면 나도 꼭 만나고 싶다는 갈망도 하고 점점 출사거리를 멀리 떠나게 되었다.
지난 9월말 경기도를 벗어나서 멀리 강원도로 못 보았던 꽃을 찾아 떠났다.
야생화의 지존이라 일컫는 물매화를 만나러 멀리 평창으로 갔다.
야생화 출사는 항상 꼭두새벽에 출발한다. 아침의 부드러운 햇살을 받은 모습이 너무 아름답기 때문이다. 역시 이날도 제일 먼저 도착하여 주차시키고 자그만 하천으로 내려간다. 발길을 내리는 순간 처음 보는 병아리풀이 앙증맞게 방긋 웃으면서 반겨준다. 곱게 치장한 병아리들을 최대한 예쁘게 담고 위로 발길을 돌리니 저 앞에 그토록 보고 싶었던 물매화가 예쁘게 빠알간 립스틱을 바르고 화장한 고운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반긴다. 숨이 멎을 것 같다. 살며시 엎드려 무릎을 꿇고 첫인사를 한다.
뽀얀 흰꽃잎 다섯장이 빠알간 루즈를 살며시 바른 다섯 개의 수술을 살포시 떠 바치고 있다. 수줍은 새색시가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반겨주는 듯하다.
야생화클럽 사이트에서 보아만 왔던 물매화! 생각했던 것보다는 가냘프고 작다.
중앙의 암술을 싸고 있는 수술 바깥으로 벌과 나비를 유혹하는 현란한 헛수술 다섯 개가 있어 영락없는 매화꽃이다. 습지에서 자라서 물매화라고 부르는가 보다. 이 헛수술에는 10~20여개의 황록색의 꿀샘을 달고 있어 마치 왕관을 쓰고 있는 듯하다.
예쁜 물매화와 대화를 나누며 최대한 곱게 담으려 온갖 자세에서 담아본다.
계곡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많은 물매화에게 인사를 건네고 그 멋진 자태를 앵글에 담는다.
여기저기 자주쓴풀, 진범, 쑥부쟁이, 구절초, 솔체꽃 등이 지들도 담아달라고 손짓을 한다.
한나절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영월 동강으로 갔다.
출사를 나오면 하루종일 시간을 보낸다. 큰땅빈대, 선괴불주머니, 오이풀 등등.
사진촬영에는 여러분야가 있다. 풍경, 인물, 조류사진 등등.
하지만 나는 실력도 없거니와 다른 분야의 사진은 잘 모른다.
가끔 풍경사진도 찍어보고 인물사진도 찍어보고 하지만 내게는 쉽지 않다.
풍경사진은 그 뭐라할까 감정의 교감이 없는 것 같고 인물사진에서는 모델로부터 여러감정을 끌어내어 담아내야 하는데 그게 어렵다. 하지만 야생화촬영에서는 오히려 꽃이 내게 많은 감정을 전달해 준다.
야생화를 담으면서 나는 수많은 대화를 나누고 나 자신 감정의 위로를 받고 삶의 기쁨과 희망까지도 꽃으로부터 받는다.
요즘은 많이 우울하다.
세계경기가 끝이 어딘지 모르게 추락하는데다 꽃이 없으니 어디에다 삶의 의지를 두어야할지 모르겠다. 이제 겨울의 끝자락, 빨리 추위가 물러나고 꽃소식과 함께 우리 경제도 따뜻한 봄을 맞았으면 좋겠다.
복수초, 바람꽃, 얼레지, 앵초….
많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