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혹(不惑)이란 술의 유혹(誘惑)에도 해당되는 말인가 보다. 나이 40 이후에는 그다지 술을 진하게 마셔본 기억이 없다. 무엇이 되었든 간에 유혹에 쉽게 빠져 버리던 때가 있었을 성싶은데 지금은 그 유혹이 그립다.
최초의 술이 어떤 맛이었는지 전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과연 무슨 말을 할까? 야생 포도나무는 200만년 전부터 존재해 왔다하니 자연이 만들어 낸 술의 역사도 과일이나 곡식의 기원과 같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겨우 7천년 전에야 인간들이 술로 대접해 주었다 한다. 포도나 보리 등이 물에 불려져 자연 발효가 일어나면서 생기게 된 걸쭉한 음료(지금처럼 정제된 술이 아니었음은 틀림없다) 즉, 술을 마셔보고 그 맛에 반하여 또 다시 취해보는 즐거움을 누린 최초의 인간이 분명히 존재했을 것이다. 그가 누구였던지 그 짜릿한 흥분을 온 몸에 느끼고 다른 이에게도 권했을 터(지금 우리가 그러는 것처럼)임도 상상이 간다.
나는 술을 마시고 난 후 마신 기억을 못한 경우가 생애에 몇 번 있었다. 가장 최초의 일은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집에서 양조장을 하던 관계로 동네 친구들의 등살에 못 이겨 독한 모리미(막걸리는 여기에 보통 2배 이상의 물을 탄다)를 몰래 퍼다 마신 것이 최초의 필름이 끊긴 사건이었다. 가장 오랜 동안 기억을 못했던 기억(?)은 본과 1학년 때로 생각되는데 적어도 24시간 이상 끊겼었다. 기말고사인가를 본 후 점심때부터 빈속에 소주를 7병(확실치는 않다) 둘이서 나눠 마시고 온 하루를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보냈다 한다. 지금은 조선대학교에서 의젓하게 재직하고 있는 윤모 교수가 공범인데 그도 똑같이 다음날 오후에 깼다. 불혹(不惑)이란 술의 유혹(誘惑)에도 해당되는 말인가 보다. 나이 40 이후에는 그다지 술을 진하게 마셔본 기억이 없다. 무엇이 되었든 간에 유혹에 쉽게 빠져 버리던 때가 있었을 성싶은데 지금은 그 유혹이 그립다.
요즈음은 와인을 주로 마신다. 15년 전 일본의 한 단체에 초대받아 간 적이 있었는데 모임에서 처음 와인 시음회를 접했다. 이후로 관심을 갖고 와인을 마셨으니 역사가 나름대로는 꽤 오래된 편이다. 레드 와인으로는 보르도 지방의 와인을 좋아한다. 보르도의 몇몇 와인은 이름값 덕분에 어부지리로 선택되기도 하지만 나는 묵직하고 혀에 오래 남아있는 이 타입을 좋아한다.
보르도 와인은 여러가지 품종의 포도를 섞어 만들므로 생산자가 중요한데 보통 무통 로쉴드, 메독, 생테밀리옹을 선택한다. 화이트 와인으로는 샤르도네 품종의 와인을 선택한다. 그러므로 단일 품종의 포도를 사용하는 부르고뉴 타입의 와인을 선호하지만 요즈음은 신생국인 호주, 미국, 칠레의 화이트 와인을 더 즐긴다. 좀 더 특별한 와인을 선호한다면 더 멋져 보이겠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처음에는 남이 잘 모르는 술로 폼을 잡기 위해 와인을 마셨는데 지금은 그냥 마신다. 내가 나비넥타이를 매는 이유도 똑같다.
자라고 공부하는데 썼던 돈이 모두 탁주에서 나왔지만 막걸리는 생존의 술이라 생각할 뿐 별다른 매력이 없다. 값싸고 특유한 뒷맛이 있어서 마시는 소주는 소란(騷亂)의 술이다. 소주를 마시면 역시 말소리가 커지고 분위기가 소란스러워진다.
같은 떠들썩한 분위기를 보이지만 맥주는 흥겨운 기분을 갖게 하는 매우 세련된 감각을 지닌 음료이다. 포도주를 귀족적이고 문명화된 음료로 보는 측의 입김이 세어져 맥주를 대중적이고 야만적인 술로 여기는 부당함이 있지만 역시 맥주는 축제의 술이다. 맥주의 거품이 윗입술 바깥쪽 피부와 몇개 안되는 수염-치과의사임에도 불구하고 뭐라고 부르는지 모르겠다-을 간지럽히는 기분은 즐거움 그 자체다.
와인은 대화의 술이다. 좋아하는 와인을 빨리빨리 취하도록 마셔댈 수는 없다. 사랑하는 와인을 앞에 두고 혼자 잘난체 떠들어 댈 수는 더욱 없다. 와인 앞에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놓아두어야 한다.
나에게 있어 브랜디는 침묵의 술이다. 한 밤 중에 생각이 깊어지고 잠도 안오면 스트레이트로 마신다. 포도주 계보인 브랜디와 달리 태생이 맥주 계보라 그런지 위스키는 광란의 술로 기억되어 그다지 즐기지 않는다. 룸살롱의 기억 때문에 나에게 푸대접을 받아서 그렇지 몇몇 위스키는 꽤 괜찮은 술이다. 위스키는 왜 그런지 꼭 물에 타먹는 습관이 있다. 술에 대한 습관은 학습에 의한 것인가는 알 수 없지만 나에게는 자연스럽다.
언젠가 기회가 오면 술에 대한 공부를 하고 싶다. 술에 관한 이야기를 술술 풀어 낼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