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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1)얻은 것과 잃은 것/김융을

지난해 오랜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니 많은 분들이 만류하고 나섰다. 한국 의사들은 어떻게든 기회가 되면 미국으로 나가고 싶어하는데 반대로 한국으로 돌아 간다 하니 모두들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17년 전 한국을 떠날 때에도 같은 말을 들었다. ‘개업의로서 자리를 잡고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는데 무엇이 아쉬워 박차고 나가는 것이냐" 고.


나는 과연 올바른 선택을 하였던 것일까? 남들과 다른 선택에서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잃었나?
개업 7년 차, 반복되는 일상에 지루함을 느끼기 시작할 즈음 교정 공부에 대한 열망과 미국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혀 삶의 터전을 정리하고 무작정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남들과 다른 길을 간다는 것은 위험한 선택이었기에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뜨거운 열정과 노력 그리고 믿기 어려운 행운이 따라 주어 그토록 원하던 공부를 마칠 수 있었다. 여기에 미국에서 전문 직업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미국 치과의사 면허증과 미국 교정 전문의라는 자격증은 하나의 부산물이었다.


비록 늦은 나이에 시작한 공부였지만 이를 통해서 나는 예전과 다른 치과의사가 되는 기회를 얻었다. 한 가지만 한다는 전문성과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어디까지라는 분명한 내 능력의 한계를 알게 됨으로써 임상에서 매우 편안한 마음으로 환자를 대할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내가 얻은 것 중에서 가장 값진 것은 미국에서의 오랜 교육과 임상을 통하여 어떠한 경우에도 환자를 위하여 최선을 다한다는 전문 직업인으로서의 직업의식이다. 조건 없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의무감은 갈등 없는 편안함을 주었다.


덤으로 주어진 미국생활은 여유로웠다. 일주일에 3, 4일만 출근을 하여도 남들로부터 놀고 먹는다는 눈총을 받을 염려가 없었고 주말 진료, 야간 진료를 하지 않아도 남들보다 마음이 가난할 필요가 없었다. 일주일에 2, 3일은 골프를 즐길 수 있었고 주말이면 가족과 함께 풍요로운 자연을 즐길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이루기 힘든 여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잃은 것도 많았다. 잃어버린 세월을 돌이켜 보는 것은 가장 가슴 아픈 일이다. 인생의 황금기라는 30~40대 초반을 강의실과 실험실에서 보냈고 시험 준비와 보고서 작성에 시달려야 했다. 졸업의 환희에 젖어보기도 전에 어느덧 돋보기가 필요한 나이가 되었다. 내 청춘의 꽃은 이렇게 활짝 피어보지도 못하고 시들어 버리고 말았다. 이제서야 삶의 터전을 다시 닦아야 된다는 현실은 내 어깨를 무겁게 한다. 한국에 남아 열심히 경제적 기반을 닦아 여유로운 중년을 살아가고 있는 동료들을 문득문득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풍요와 여유로움 속에 숨어있는 보이지 않는 스트레스는 미국생활의 씁쓸한 뒷맛이었다. 그 값진(?) 영주권을 받기 까지 초조와 긴장으로 보내야 하는 긴 세월은 그 첫 관문이다. 낯선 곳에서 다른 피부색을 가지고 전문 직업인으로 자존심을 지키고 그들의 신뢰를 얻으며 산다는 것은 영원한 고행길이다.


마늘 냄새를 없애려고 좋아하는 한국 음식을 멀리해야 했으며 잠깐만 방심하면 튀어나오는 콩글리쉬(?) 악센트를 숨기기 위해서 하루도 영어 공부를 소홀히 할 수 없다. 음악을 들어도 머리 속에서는 가사를 해석하고 영화를 보아도 눈을 감고 대사를 읊어야 한다. 풍요와 여유, 그러나 한가히 즐길 수 만은 없는 것이다.


숨막히는 자녀교육을 위하여 유학을 보낼까 말까 갈등을 할 필요가 없어서 좋았다. 터무니 없는 유학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늦은 나이에 구부러진 허리를 혹사하지 않아도 되었다. 우리 아이들은 학원을 다니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영어를 익혔고 등록금 없는 공립학교에서 밤잠을 설치지 않았어도 원하는 대학을 갔고 졸업 후 훌륭한 사회인이 되었다. 그러나 오랜 미국교육에서 아이들은 한국인이 아닌 미국인으로 자라고 있었다. 지난 9·11 테러 사건이 있은 후 우리 큰 아이와 나는 심한 논쟁을 한 적이 있었다. 그에게 미국은 정의이며 미국에 반대되는 모든 것이 잘못된 것이었다. 오랜 미국식 교육과 문화는 우리 아이들을 한국에 돌아와 살 수 없는 타국인으로 만들어 놓았다.


한국은 재미있는 지옥, 미국은 지루한 천국이라는 말이 있다. 함께 나눌 사람 없는 혼자만의 안락함은 의미 없는 행복이다. 일주일 간 매일 골프를 쳐도 함께 즐길 친구가 없으면 한갓 소일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따금씩 만나는 흥미로운 케이스, 스트레스를 주는 환자 이야기, 최고의 권위자인 냥 늘어놓는 치과무용담도 저녁에 함께 만나 들어줄 동료가 없으면 하루의 치과 생활은 지루한 일상에 지나지 않는다. 어느 날 문득 ‘내가 왜 이 낯선 얼굴들을 위하여 이곳에 있는 것일까" 하며 깊은 회의에 빠지기도 했다.

 

인생은 동시에 여러 길을 갈 수 없다. 하나를 얻으면 다른 것은 포기해야 한다.  남과 다른 선택에서 많은 것을 얻었고 많은 것을 잃었다. 그 것이 옳은 선택이었는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다양한 삶을 살아 본다는 것이 얼마나 흥미로운 일인가? 그리고 이렇게 다시 한국에 돌아와 또 다른 내 인생을 살아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