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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2)발치/이승훈

 

“선생님 1시 반 환자 오셨어요. 마취해 놓을까요?"
 점심 식사 후의 짧은 휴식 시간. 식곤증을 이용해 잠시 달콤하게 졸았건만 야속하게도 1분의 오차도 없이 의국의 문은 열리고 치과위생사의 사무적인 외침이 들려온다. 인턴에게 마취를 지시하고 조금 더 졸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처음 진료 예약을 잡을 때부터 ‘아프지 않게"를 부탁하며 울상을 짓던 환자의 표정이 생각나 미련 많은 표정으로 의국을 나와 진료실을 향한다.
겁에 질려 떨고 있는 20대 후반의 여자 환자. 그렇지 않아도 하얀 얼굴이 더 하얘지니 그 아름다움도 더 해진 느낌이지만 한가하게 감상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다.
“너무 걱정 마시고 천천히 심호흡해 보세요."


“아프시면 언제든지 왼손을 드시면 되요. 잠시 중단 할테니까요."
사람이 공포를 느끼는 요인 중 가장 큰 것은 무지에서 오는 법. 아무리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설득해 봐야 어린 아이를 사탕으로 어르는 만큼의 효과도 기대할 수 없다. 차라리 조금은 강압적이라도 일단 마취를 시작해서 많이 아프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낫다.
“시작하겠습니다."


‘삑"하는 기계음과 함께 천천히 뒤로 기울어지는 치과용 의자. 긴장이 극에 달한 환자는 아예 손을 합장한다. 피식하고 세어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고는 환자의 시선을 피해 주사기의 침을 천천히 환자의 구강 끝에 자입 한다. 하악 사랑니 발치를 위한 전달 마취. 천천히 부드럽게 시린지를 누르는 한 환자는 거의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거의 다 됐어요. 아프셨어요?"
“아니요."


“앞으로도 별로 안 아플거예요. 혹시 아프면 왼손 드시면 돼요. 아시겠죠?"
“예."
 처음 진료실을 들어섰을 때는 가벼운 인사조차도 못했던 환자. 이제는 묻는 말에 척척 대답도 잘한다. 어느 덧 표정도 많이 편안해졌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 사람의 신뢰를 얻는 일이라던데 주사 한대 안 아프게 놓은 것으로 그 어렵다는 것을 얻었다고 생각하니 치과의사는 참 괜찮은 직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취가 잘 됐는지 한번 눌러 볼게요. 만지는 감각은 있을 거예요. 아프시면 왼손 드세요."
 부드러우면서도 확신 있는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하긴 하지만 이것은 거짓말이다. 나의 오른손에 들려있는 것은 단지 ‘누르는 기구"가 아니라 날이 시퍼렇게 서 있는 블레이드다. 방금 얻은 신의를 배신하는 셈이긴 하지만 때로는 모르는 게 약. 스르륵 소리 없이 하지만 충분한 깊이로 파고드는 블레이드. 재빠르게 기구를 periosteal로 바꾸고는 부드럽게 근육과 치조골을 박리한다. 어느새 하얗게 들어나는 뼈와 숨어 있던 사랑니. 방사선 사진으로 이미 확인 하긴 했지만 앞의 어금니에 바짝 붙어서 기울어져 있기에 발거된 치아가 나올 출구가 너무 좁아서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발치가 불가능하겠다.


문득 얼마 전에 읽었던 선문답이 생각난다. 
‘호리병 안에 아기 새 한마리를 넣고 먹이를 넣어 길렀다. 이제 새가 커서 놓아줘야 하나 아뿔싸, 입구가 작아 새가 나오지를 못하는 구나. 병을 던져 깨자니 안의 새가 다칠까 염려되고, 이대로 안에 두자니 좁은 병 안에서 얼마 버티지 못할 터이니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핸드피스를 잡고 치아의 머리를 자르기 시작한다. 선문답 속의 새를 이런 방법으로 꺼내서는 안 되겠지만 나올 공간이 작기에 머리와 뿌리를 나눠서 꺼내야만 한다. 강력한 모터가 돌아가는 소리, 흡입기 소리, 그리고 치아 자르는 소리. 소음과 함께 치아의 머리가 잘려 나간다. 치과의 여타 술식과 다르게 심미적으로 모양을 다듬지 않아도 되는 점 때문에 발치는 좀 더 남성스러운 느낌이 든다.
뿌리에서 완전히 분리되고도 나오지 않으려는 듯 좁은 입구 안에서 뱅뱅 돌던 치아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꺼낸다.


머리가 쉽게 제거됐으니 9부 능선을 넘은 것과 같다. 이제 뿌리의 차례.
하지만 환자의 젊은 나이와 뿌리의 휜 정도로 봤을 때 쉽게 뽑힐 것이라는 당초의 예상과는 달리 뿌리 끝 어딘가가 걸린 듯한 느낌과 함께 나오질 않는다. 조금만 더 힘을 주면 나올 듯도 하지만 자칫하면 뿌리 끝이 부러져버려 엄청나게 고생할 수도 있다.


하루에도 몇 번이고 겪는 이런 상황을 대할 때 마다 어처구니없게도 처음 그녀에게 프러포즈하던 순간이 생각난다. 행동을 통해 대충 유추할 뿐 도무지 알 수 없었던 그녀의 속마음은 방사선 사진을 통해 추측할 뿐 정확히 알 수 없는 뿌리 끝과 닮았다. 조금 더 만나 보다가 고백을 할까 아니면 용기 있게 지금 덤벼들까를 고민하는 망설임은 주변의 치조골을 더 삭제할지 아니면 자신감 있게 좀 더 힘을 가할 지를 결정해야하는 것과 비슷하다. 설레일 만큼 두근거리는 가슴. 그래, 그때는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다는 말만 믿고 뚝심 있게 밀어붙였다. 그렇다면 오늘은?


단호하지만 신중하게 발치기자를 쥔 오른손에 힘을 더 한다. 조금씩 조금씩 밀려나오는 치근. 하지만 끝까지 방심하지 않고 과한 힘을 가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마치 고백의 말을 다 마치고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순간과 너무도 흡사한 이 긴장감….
드디어 온전하게 발거된 뿌리 끝과 발치창이 눈에 들어온다. 옆에서 진료를 도와주던 치과위생사와 눈이 마주치자 씩 한번 웃고는 소매로 이마를 한번 훔친다. 이 순간의 희열을 무엇으로 설명할까.
“새는 없습니다."


“저도 당신을 사랑해요."
“선생님 수고 하셨습니다."
 인생의 희로애락과 깨달음의 희열까지 발치를 하는 과정에 모두 들어있다고 우긴다면 너무 심한 과장이 되겠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 나는 치과의사라서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