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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4)그대는 지난 시간의 추억의 집합체이다/김영호

그대는 지난 시간의 추억의 집합체이다

 

얼마 전 대학 졸업 2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 참석을 하여 오랜만에 많은 대학 동기 동창들의 얼굴을 보고 악수를 나누고 학창 시절의 추억을 되새기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아니, 졸업을 한지 벌써 20년이 지나다니! 젊음은 벼락처럼 지나간다고 하더니 친구들의 얼굴에는 20년의 연륜이 때로는 허옇게 바랜 머리칼에서, 원숙한 미소에서, 그리고 때로는 다소 지쳐 보이는 눈빛에서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내게는 제자들에게 알리지 않고 혼자만이 아는 묘한 즐거움이 있다. 그것은 매년 들어오는 신선한(?) 제자들의 모습에 가만히 20년 전 그 나이 때의 내 모습을 겹쳐서 바라보는 것이다. 자식을 여럿 낳아도 다 제각각이라고 하는데 하물며 남의 자식들의 모임인 학교의 제자들은 제각각을 넘어 때론 내가 소화할 수 있는 지경을 넘는 생각과 행동을 하기도 하니, 그 겹쳐진 풍경은 제자들마다 달라서 그 중첩된 인물화 감상에 발을 딛는 대학 건물과 강의실은 실로 다양한 인물화 전시장이 된다.


 연구실에서 책을 뒤적거리다가 문득, 조금 전 만난 제자는 20년 후에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며 거울을 바라다보다 명확히 깨닫게 된 사실은, 지금의 내 모습은 대학을 졸업한 후 지난 20년간 지나온 생각과 말과 행동의 집합이라는 것이다. 미래의 진로 문제로 고심했던 기억들, 친구들과의 우정과 사연들, 대학 교수로서 생활하며 겪었던 일들, 아내와의 만남과 결혼, 지금은 많이 자랐지만 두 아이의 출산과 육아에 얽혀 있는 에피소드들….


그러고 보니 내 얼굴에 그려져 있는 중년의 주름도 하나하나가 사연이 있을 법하다. 그 중 깊은 주름 하나는 아마도 아내가 큰 아이를 막 출산했을 때의 충격으로 생긴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때 아이는 태어나는 순간에 울지 않았고 어린 몸은 새파랗게 질려 호흡을 못하고 있었다. 아이는 바로 중환자실에 들어가 한 달간의 사투를 벌이고 수술까지 감내하며 생명을 이어나갔는데 그 기간 중에 받았던 충격이 내 몸 어딘가에 새겨졌을 것이고 오래된 나무의 나이테처럼 이마에 선을 하나 그었을 것이다. 지금은 고등학생이 되어 키와 몸무게가 아빠와 비슷하게 자란 녀석의 뒷모습을 보며 간혹 과거의 기억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이마의 식은땀을 닦는 시늉을 하곤 한다. 하물며 사랑하는 이들을 잃어버린 기억을 지닌 사람들은 때론 치유되기 힘든 상처로 가슴에 남아 있을 것이고, 젊은 날의 고뇌와 방황 또한 얼굴 어딘가에 새겨져 있을 것이다. 나는 아끼는 제자들의 팽팽하고 젊음이 넘치는 모습을 보며 사랑의 마음과, 또한 저 제자들 역시 미래의 사연들이 얼굴에 그려질 것이라는 일종의 연민이 교차하는 시선을 보내곤 한다. 제자들아, 부디 좋은 사연들을 많이 만들렴.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나는 지난 시간 동안 쌓아온 추억의 집합 그 자체이다. 시간의 힘은 대단하여 한 사람에게 허용된 시간 중 특정한 부분에 집중된 시간은 중년을 넘어 일생 동안 위력을 미친다. 시간의 강물은 양순한 듯 흐르지만, 그 깊은 바닥에는 양날의 검처럼 날이 서 있어서 때론 한 개인의 삶에 크고 작은 상처를 입힌다. 돌이켜 보면 지금의 나의 모습은 의미 있는 시간의 축적과 의미 없거나 해로운 시간의 축적의 혼합물이고, 얼굴에는 그 시간이 준 영광과 상처가 고스란히 남겨져 있는 것이다.


앞으로의 시간 또한 아직은 날을 감춘 채 우리의 일상을 천천히 따라오며 둑에 물이 차오르듯 몸속에 차오를 것이다. 그 동안에도 가족의 사랑과 주위 사람들과의 인연들이 이어질 것이고, 이 세계와 사회가 주는 직·간접적인 영향들이 또한 쌓여갈 것이다. 그 시간들의 축적은 먼 미래에 다시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몸과 마음에 남아 나와 그대가 어느 날 문득 바라보는 거울에 그 흔적을 여실히 드러낼 것이다. 이만 하면 우리가 지금 이 순간에 필요 없는 일에 진을 빼지 않고, 욕심을 내지 않아 상처를 덜 받으며 사랑하는 이들과 좋은 사연을 만들어가야 하는 이유가 충분히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