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표류기(하)
<1757호에 이어 계속>
진형철
임마누엘치과의원 원장
개성으로 돌아와 점심식사를 위해 ‘민속여관’에 들렀다. 민속여관에는 여러 식당이 있었는데 우리가 들른 식당의 서빙하는 아가씨들이 참 친절했다. 메뉴는 한 가지 13첩 반상기!
새벽부터 주린 지라 배가 꽤 고팠는데 음식가지수가 워낙 많아서 맛만 보는데도 배가 불렀다. 민속여관은 정겨운 동네같이 생겼다. 맑은 개천 양옆으로 여관들이 있는데 식사한 후에 개울을 따라 걷다보면 정원을 거니는 느낌이어서 편안하다.
점심 후에는 본격적으로 개성 시내관광에 나섰다. 고려 말 충신 정몽주의 집터에 세워진 숭양서원은 뒤편 높은 곳에 사당이 있다. 사당에는 정몽주의 초상화와 그의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러줬다는 우현보의 위패가 같이 있다.
이날은 가을인데도 무척이나 더웠다. 서원 앞에서 아가씨들이 ‘에스키모’를 팔고 있다. ‘에스키모’는 아이스크림의 상표 이름이었는데, 그 상품의 인기가 높다 보니 아이스크림 대신 쓰게 된 것이라고 한다. ‘에스키모’의 주원료는 우유, 사탕, 빠다, 찹쌀, 닭알, 향료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얼음보숭이’는 지금은 쓰지 않는 예전 북한말이라고 한다. ‘에스키모’로 더위를 가라앉히고 숭양서원에서 멀지 않은 곳 ‘선죽교’로 이동했다.
선죽교가 가까워지면서 내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릴 적부터 궁금했지만 확인 할 수 없었던 것 중 하나… 그의 피가, 핏자국이 정말 남아있나?… 이 것을 확인할 수 있지 않은가.
정몽주가 철퇴로 격살 당했다는 선죽교. 그 바닥 돌에 분명 불그스름한 핏자국이 감돌았다. 어디선가 “누군가 붉은 기운이 도는 돌을 가져다 끼워놓은 것”이라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닐텐데… 나는 그냥 그의 피라고 믿기로 했다. 정몽주의 후손이 선죽교에 난간을 설치해 통행을 막고 바로 옆에 새로운 다리를 놓아서 지금은 선죽교를 건너다니지 않는다.
선죽교 맞은편에는 조선 영조와 고종 때 세웠다는 표충비가 있다. 비석에 새겨진 어필도 어필이지만 비석을 받치고 선 귀부의 조각이 너무도 정교하고 생생하다. 마치 살아 움직일 듯 했다.
개성 시가지는 다니는 곳마다 한적하다. 관광 도중 가끔 짬 시간에 거리를 둘러보았는데 주위에 가끔 일반인들이 지나가기는 하지만 그리 흔하지 않다. 아마 관광지 근처 출입을 통제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주민을 촬영하거나 정해진 관광지 이외의 방향으로 촬영하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그런 연유로 북적대지 않아 관광하기에는 좋지만 북한 주민들과 얘기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특히나 개성인들은 바빴다. 우리 가족이 여행할 그 당시는 개성사람들의 대부분은 ‘개성공단’에 일하러 가기 때문에 쉽게 볼 수 없었다. 오후 두 시가 지나니 길거리에는 아이들이 방과 후에 집에 가는 모습들이 보였다. 그들은 눈이 마주칠 때면 자연스레 손을 흔들어준다.
마지막 일정은 고려박물관이었다. 이 곳은 고려 성종에 국자감으로 시작해 충렬왕 때 성균감으로 되었다가 오늘날까지 이어오는 성균관이다. 이 곳에는 30여미터 높이의 1000년 된 느티나무와 수 백년 된 은행나무들이 여기저기 서 있어 그 역사를 미루어 짐작케 해 준다.
정면에 명륜당과 그 뒤로 대성전이 있다. 이 곳은 1988년 9월 개성의 성균관을 새로 단장하여 박물관으로 개관하였으며, 2만㎡의 부지에 서재·동재·명륜당·향실·대성전 등 12동의 본 건물과 6동의 부속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대성전의 제1진열관에는 고려시대 개성시의 옛 모습을 그린 지도와 왕궁인 반월대모형, 반월대에서 출토된 막새들과 꽃무늬벽돌, 흰쌀과 좁쌀, 종이·비단, 그리고 쇠투구와 갑옷, 쇠활촉 등이 전시되어 있다. 제2진열관에는 금속활자와 목판, 천문학과 관련된 자료들과 시대별 고려자기들이 진열되어 있다. 정원에는 고려시대 돌공예를 보여주는 여러 가지 돌탑과 석등으로 가득하다.
박물관 입구에는 우표전시관과 기념품점이 있다. 우표전시관에서는 북한의 우표를 한눈에 감상할 수 있고 기념품 가게에서는 북한 물건을 구경하고 살 수도 있었다.
아쉽지만 마지막 일정을 마치고 오는 도중에 버스로 개성공단을 둘러보며 북측안내원과 인사를 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너무 많은 걸 보고 왔다.
우리 가족이 개성에 다녀온 날은 2008년 10월 4일이었다. 가기 2주전인가 인터넷 검색을 하다보니 개성관광이라는 광고가 눈에 띄었다. 당시 보통 수개월 전부터 예약해야 가능했던 개성관광이 열려있는 것을 보고 급하게 신청하게 됐는데 운 좋게 다녀왔던 것이다.
다녀와서 며칠이 지나서야 우리가 개성관광이 가능했던 이유를 알고 씁쓸해졌다. 원래 10월 4일은 지난해(2007년) 우리나라 대통령이 육로로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10·4남북공동선언’을 한 날이라고 한다. 그런고로 기념일에 대비하여 일절 관광예약을 받지 않았었는데 기념식이 무산되는 바람에 여행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더욱 가기 힘든 곳이 되어 있지만 머지않은 시간에 다시 열릴 것을 고대한다. 그리운 우리 땅, 우리 형제들을 다시 보지 못할까봐 두렵다. 내 마음은 아직도 개성에 표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