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순구개열 청소년 ‘버디캠프’(상)
이 지 나
이지나치과의원 원장
치과의사로서 만나기 쉽지 않은 구순구개열 환자를 진료하게 된지 15년 정도 되었다. 외과를 전공하고 싶었지만 결혼과 유학으로 인해 실현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유학하는 동안 교정과에서 수련을 받으면서 악안면 수술과 구순구개열에 다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기회가 생길 때 마다 수술실이나 구순구개열 치료팀에서 열리는 세미나에 참석하곤 했다. 그 후 한국에 돌아와서 이런 환자들을 접할 수 있는 대학병원에 들어갈 기회가 없게 되자 이 분야에 대한 열정을 덮어야 했다. 또한 국적문제로 인해서 개업도 할 수 없었고 오로지 취직해 일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했다. 그러던 중 친구를 통해 구순구개열 환자 진료에 협진 의뢰를 받게 되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 내게 다가왔고 잊혀졌던 열정이 되살아나고, 하고자 했던 꿈이 현실로 다가왔다.
구순구개열의 원인은 복합적이고 완전히 규명되지 않았고, 입술, 치조골, 경구개, 연구개 등이 갈라진 형태로 태어나는 선천성 악안면 기형의 한 형태다. 태어났을 때 부모가 겪는 충격과 주위사람들에게 알려질까 하는 두려움이 정리되기도 전에 수유의 어려움과 봉합수술 등의 문제가 눈앞에 시작된다. 아이가 서너 살쯤 되었을 때는 공기가 코로 빠져나가 소리가 잘 안 나오고 발음도 잘 되지 않는 일을 겪게 된다. 발음을 위해 언어치료와 추가 수술 등을 하지만 발음의 개선이 안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치열도 매우 불균형하게 되어있고 상하악골의 부조화로 몸 성장이 끝나면 악골 수술을 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이런 연유로 인해서 구순 구개열 아이들은 태어나서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수차례의 수술과 여러 과목 의사들의 계속적인 치료와 관찰을 필요로 한다. 이중에 교정의사도 이 치료팀의 한 일원이 되어 한 아이가 태어나서부터 대학에 갈 때까지 그들의 삶을 지켜보게 된다.
시대적으로 보면 15년 전에는 몸조리도 못한 산모가 친정식구와 함께 태어난 지 며칠 안된 아기를 데리고 와서 수유장치를 만들어 가곤 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부부가, 혹은 시댁식구와 함께 아기를 데려오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런 부모들을 위해서 인터넷 동호회도 많이 생겨나서 부모들이 정보를 교환하고 서로를 위로하는 장이 마련되었다. 구순구개열 아이들과 부모를 위한 모임과 캠프를 하는 단체도 만들어졌다.
내가 함께 일하는 구순구개열 클리닉 팀에서도 초등학교 졸업 전 까지 아이들과 부모들을 위해 14년째 여름 캠프와 겨울 모임을 가져오고 있다. 그러나 가장 캠프를 필요로 하는 대상은 외모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자아를 찾기 시작하는 사춘기 청소년들이 아닐까 한다. 지금과 같이 외모 지상주의가 지배적인 사회에서는 지울 수 없는 흉터가 얼굴에 남는 구순구개열은 다른 어떤 신체적 장애 보다 정신적으로 극복하기가 더더욱 어렵다. 이런 아이가 거울을 쳐다볼 때 마다 부모의 마음은 시려오고 가슴은 철렁 내려앉는다.
왜 우리나라에는 구순구개열 청소년을 위한 캠프가 없을까? 장애우의 원활한 사회생활을 가로 막는 제일 큰 장애물은 그들을 바라보는 사회인식이다. 또 이런 청소년들에게는 입시라는 제도가 개인 정서를 다독거릴 시간을 허용하지 않는다. 나 또한 이런 문제를 안타까워하면서도 그들을 위해 뭔가 하지 않고 있었던 나의 장애물은 개인 치과의원을 하고 있는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하는 소극적 태도이었다. 그러던 중 청소년을 위한 캠프를 해야겠다는 결심이 서게 되는 일이 일어나게 되었다. 하루는 중학교에 진학하려는 남자 학생이 진료를 받으러 왔는데 그 아이는 병원에 오게 되는 자신의 모든 상황이 짜증나고 화가 나는 것 같았다. 학생이 돌아간 후에 그 어머니가 접수대 직원에게 하소연 했던 말을 전해 들었다. 진학하기 전 또 한 차례 수술을 받으러 가야 한다고 어머니가 말 하자 그 학생이 부엌에 들어가 칼을 가져와 어머니 앞에 놓고는 ‘왜 나를 병신으로 낳았느냐, 나 혼자 죽기는 무서우니까 나랑 같이 죽자"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듣는 나는 완벽한 준비를 해서 캠프를 하기로 한 마음을 되돌려 부족하더라도 하루 빨리 캠프를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실천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래서 캠프 이름은 버디캠프로 출발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이 캠프를 시작하게 만든 학생은 캠프에 오도록 여러 가지로 설득했지만 끝내 오지 않았다.
캠프에 올 대상자는 치과에 내원한 학생들로 정하고, 대상 학생들을 참가하도록 부모와 학생들에게 독려하면 되지만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아이들을 누가 지도할 것인가 고민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치과에서 심미적 치료까지 마친 구순구개열 성인 중 몇 명에게 청소년 캠프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후배들의 role model로서 캠프리더로 참여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일반사람들이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으로 이 아이들을 격려하려 해도 같은 문제를 가진 언니, 오빠들이 실제 사회모델로 다가갈 때 아이들이 받는 영향은 그 어떤 캠프리더 보다 크다고 생각되었다. 서로 얼굴만 봐도 설명이 필요 없고 쉽게 공감대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캠프가 끝난 후에도 캠프 리더들이 학생들의 실생활 멘토로 도움을 주고 관계를 지속해 오고 있다.
캠프 리더를 준비 시키는데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대학생이 된 환자 한 사람은 캠프리더로 봉사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치과 문을 나섰는데 몇 분이 지나지 않아서 목사님인 학생의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다. ‘우리 애는 아직 본인이 구순구개열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캠프리더로 보낼 수 없다’, 또 ‘아직 자신의 아들과 이런 이야기를 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으니 본인이 대학생 아들에게 먼저 말씀을 나눈 후에 보내겠다’고 하셨다. 4박 5일의 캠프는 이틀 후였는데 가슴 답답한 일이었다. 아버지 아들을 위해 기도하고 계셨겠지만 나는 ‘아버지와 아들을 위해 기도하였다. 그리고 학생에게 전화해서‘이제는 네가 아버님을 위로하고 설득할 시점에 온 것 같다’고 했다. 아주 내성적인 이 친구는 아버지를 설득한 후 버디캠프의 주 멤버로 2년간 봉사하고 얼마 전에 군에 입대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