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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79번째) 세월을 거슬러 간 여행(하)

세월을 거슬러 간 여행(하)

<1769호에 이어 계속>


신 덕 재
중앙치과의원 원장

 

얼굴을 가린 마스크 사이로 땀과 눈물이 범벅이 되어 흘러내린다. 복받친 회한의 설움이 흐느낌으로 변한다. 진료를 하는 건지 흐느끼는 건지 모르겠다. 여자아이에 대한 치료를 어떻게 했는지 모를 정도다. 
노인아이가 그 많은 눈물을 왜 남모르게 흘려야만 했나?
노인아이의 어렵고 못살던 어린 시절의 회한과 어린나이에 죽은 누나에 대한 그리움이 소리 없이 흘러내리는 여자아이의 눈물 속에서 맑은 샘물처럼 솟아 나온 것이다.
여자아이의 해리한 모습은 노인아이 누나의 깡마른 모습이고, 여자아이의 유난히 큰 눈은 누나의 여윈 휑한 눈이고, 순순히 따르는 모습은 모든 일을 체념한 누나의 모습이다. 이 모든 것이 볼을 타고 내려오는 눈물 속에 엉켜있다.


더 이상 환자를 볼 수 없는 노인아이는 진료소를 빠져 나왔다. 진료소 밖 역시 진료소 안과 다름없이 후텁지근하고 음습한 무더위가 있다. 진료소 밖에는 안보다도 더 많은 또 다른 여자아이들이 있었다. 여기에도 누나들이 많았다.
흐르는 눈물은 밖에서도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많은 누나들을 보면서 더 많은 눈물이 났다. 눈물을 감추려고 뒤꼍으로 갔다. 얼마를 울었는지 모른다.


“점심시간이니 점심식사 합시다.”
점심밥이 맛있을리 만무하다. 깔깔한 점심 도시락을 먹고 있는데 누가 옆에 있다. 때가 꼬질꼬질한 바지에 신발도 안 신고 웃옷도 입지 않았다. 55년 전 노인아이가 거기에 있다. 도시락을 쳐다보는 꼬질꼬질한 아이의 눈은 왜 그리도 큰지…….


“도시락 하나 더 주세요.”
이건 절대로 구걸이 아니야! 빌어먹는 것이 아니란 말이야! 하나의 삶이야!
꼬질꼬질한 아이는 오늘 횡재를 했다고 생각할런지 모르나 이것은 그 아이의 횡재가 아니라 노인아이의 횡재다.
그 꼬질꼬질한 아이가 아니었다면 55년 전 자기를 어떻게 알아보았으며 어떻게 지금의 자기를 깨달았겠는가?  참으로 고마운 녀석이다.


고마운 녀석 때문에 자기 자신을 안 노인아이는 이번 여행이 참으로 마음을 짠하게 하는 여행이구나 싶었다. 도시락을 주고 싶어 여자아이를 찾았다. 없다. 여자아이는 누나처럼 운도 없는 모양이다. 힘든 곳에 태어났으면 행운이라도 지니고 태어났어야지. 에이! 지지리도 못난 것!

 

또다시 힘겨운 오후 진료가 시작 됐다. 서울에서 같이 온 학생들이 디지털 카메라로 진료 광경을 찍고 있다. 최첨단 노트북도 가지고 왔단다. 디카로 찍어서 금방 인화도 한단다. 같은 시대에 사는 노인아이도 잘 모르는 기계들이다. 디카와 노트북이면 모든 기록이 순식간에 이루어진단다. 신기한 기계들이다. 참으로 간편하고 편리하다.
여자아이와 사진을 찍고 싶다. 노인아이는 급히 밖으로 나가 여자아이와 동생을 데리고 진료실로 왔다.


“학생들! 사진 한 장 찍어 줘!”
여자아이와 동생은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왕방울 같은 눈을 하고 신기한 듯 디카를 응시했다. 디카는 소리도 없이 노인아이와 여자아이를 찍었다. 사진은 여자아이만 찍은 것이 아니다. 죽은 누나도 찍었다. 이 사진은  노인아이와 여자아이 사이에 징표의 사진이기도 하고 노인아이와 누나와의 애틋한 회상의 사진이기도 하다. 


이번 사진은 기계로 찍은 디카 사진이 아니라 세월을 거슬러 간 노인아이와 노인아이 누나와 여자아이가 함께 마음으로 찍은 마음의 사진이다.
“찍을 때 흔들려서 사진이 흐리게 나왔어요.”
잘 나오면 어떻고 흐리게 나오면 어떠냐? 어차피 마음으로 찍은 마음의 사진인데……. 마음의 사진은 항상 희미하고 뿌옇단다.


사진을 주기 위해 급히 진료소를 나와 여자아이를 찾았다. 없다. 이번에도 운이 없구나.
다음날도 찾았다. 없다. 오늘도 운이 없구나 하고 포기 하는데 오후 늦게 찾아 왔다. 어제 치료 받은 이가 하나도 아프지 않단다. 기분이 좋다. 누나가 웃는 듯하다.
사진을 주었다.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한다. 노인아이도 기쁘고 누나도 기쁘다. 새로운 기술로 찍은 마음의 사진을 주면서 노인아이는 여자아이에게 속으로 말했다.


“너는 앞으로 나의 누나처럼 돼서는 안 돼."
“이 마음의 징표가 너의 큰 꿈이 되어야 해."
다시 한 번 노인아이는 여자아이의 손을 꼭 잡아 본다.

내일이면 진료봉사가 모두 끝난다. 지금까지 많은 환자를 봤다. 치과파트만 250명을 넘게 봤단다. 정말 몸과 마음을 다해 진료를 했다.


그런데 마음은 헛헛하고 공허하고 텅 빈 것 같다. 왜 일까? 몸과 마음을 다해 봉사를 했지만 봉사보다는 또 다른 무엇을 얻고자 했고, 자기 자신을 내 보이기 위해 애를 써서인가? 아니면 40~50년 전 우리가 받았던 혜택을 갚는다는 허울로 오늘의 봉사를 분칠했기 때문일까? 하여간에 어딘가 모자라는 기분이 든다. 정말로 진정한 의료봉사가 되었는지 의문이 간다.
노인아이는 너무 어렵고 어울리지 않는 고답적인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


“이제 캄보디아 깜풍치아에서의 진료봉사를 마치겠습니다."
“이번 봉사팀에서 가장 연장자이신 분께서 마지막으로 한 말씀 해 주시기 바랍니다."
의료봉사팀 단장님께서 노인아이에게 한 말씀을 부탁했다. 노인아이는 부탁의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꽉 멨다. 세월을 거슬러 간 여행의 활동사진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캄보디아와 사랑의 봉사’
‘여자아이의 눈물과 굶주림으로 죽은 누나’
‘이건 구걸이 아니고 삶이란 말이야’
‘마음으로 찍은 사진은 희미하고 뿌연 거란다’
‘너는 절대로 나의 누나처럼 되어서는 안 돼’
‘내 마음의 징표는 네가 꼭 아름다운 꿈을 이루는 거야’
가슴이 뻥 뚫린 노인아이는 마지막 한 말씀을 끝내 하지 못하고 천장만 바라보며 눈시울만 적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