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94번째
농사와 진료
상큼한 흙냄새를 맡고 싶어서 한참 동안 밭에 엎드려 호미질을 하다 문득 앞산의 낙엽송 나뭇가지위에서 몇 마리 왜가리가 고요한 정적을 깨고 푸드득 날아가는 소리에 허리를 펴고 이리저리 둘러보니 어느새 정상에 있었던 운무가 서서히 밀려내려 오고 계곡 바람이 심심찮게 귓가를 스치며 지나간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치열했던 공간과 시간의 치열함의 끈이 느슨해진 것에 적잖이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이런 호사스런 여유를 이제 누리는 것도 점점 익숙해진다.
아마도 내일이나 모레쯤 비가 올 것 같은 조짐이란 느낌이 들자 이번 가을에 심을 알타리 무는 작년보다 적기에 심을 것 같다는 생각에 농부처럼 마음이 흐뭇해졌다. 모종보다는 파종이 수확을 위해 시기와 날씨가 아주 중요하다.
예부터 훌륭한 농부는 손바닥을 펴 바람을 느끼며 파종할 시기를 알아보았다고 했는데 얼추 하는 짓이 이리저리 눈치로 감잡고 하는 게 아직도 사이비 농사꾼이 틀림없는 것 같다.
이제 밤이슬 오기 전에 서둘러 로타리 마무리하고 파종하는 게 밭의 작업보다 마음의 호미질이 더 바빠졌다. 옆에서 난 인기척에 놀라 뒤돌아보니 마을 농사꾼 털보 노총각이 어느새 이리저리 눈짓으로 내가 해놓은 작업평가를 이미 다 끝내고 얼굴에 알 수 없는 미소를 띠며 “농사가 뭐 그리 재미있소?” 이 말로 내 기를 먼저 팍 죽이고 내 손에 호미를 훔쳐 가더니 손수 시범을 보이기 시작한다. 고랑과 고랑사이는 큰 발걸음 간격으로 하고 파종 간격 구멍을 손뻠하나 사이로 해야 하며 씨앗을 심을 때는 한 구멍에 3개씩- 하나는 하늘의 새를 위한 것이고 또 하나는 땅속의 벌레,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사람을 위한 것.
심고 흙은 씨앗부피의 3배로 높이고 덮어야 하고… 난 담임 선생님의 훈시를 듣는 어린 학생처럼 다소곳이 따라가면서 연방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존재를 인정해 준다.
신이 난 그 총각은 연신 온몸에 땀이 뒤범벅이 되어 몸짓, 말짓으로 가르쳐 주다 보니 내가 할 일이 어느새 쌈밥 먹는 입처럼 깔끔하게 정리되어 버렸다. 계면쩍기도 하고 멋쩍어 나도 서둘러 씨앗을 조심스럽게 평가를 받을 양으로 심기 시작했다.
어느새 농사꾼이 보면 사이비 농사일이라 할 수 있는 일을 해온 지가 네 번째 해가 다 되어 간다. 가끔은 내가 왜 이 힘든 농사일을 사직했을까 하는 생각이 내 마음의 벽을 두드린다.
문득 진료실에서 생활이 내 인생의 전부인양 살아온 세월이 흐르는 물위에 낙엽이 정신없이 떠내려가는 것처럼 시간에 좇기고 환자에 좇기고 이런저런 일에 휘둘려 세월이 나를 좇아오는 게 아니라 시간을 좇아 허겁지겁 살아 온 나를 뒤돌아보게 한다.
이 세상의 일이란 수많은 세계관, 직업관, 가치관, 경제관, 종교관이 교차하면서 돌아간다. 옛날 중국 춘추전국시대 이전에 인간됨이란 조화로운 인간을 뜻하였다. 다시 말해서 농사일도 잘하고, 붓글씨도 잘쓰고 사냥을 위해 말도 잘 타고, 화살도 잘 쏘는 그런 자연을 누리는 균형 잡힌 인간을 지향했다. 그런데 부국강병의 논리에 가치관을 우선시 하는 시대에 들어서서는 소위 전문성이라 할 수 있는 개념의 효율성의 극대화라는 이점 때문에 각각의 일들을 분리시켜, 농사일만 하는 사람은 농사일에, 말타는 사람은 말타는 일만, 붓글씨 잘 쓰는 사람은 붓글씨 쓰는 일에만 매달리게 만들었다. 즉, 균형잡인 인간이 요구되는 게 아니고 한가지 일만 잘해도 되는 편식에 치우치는 불균형적인 인간을 요구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 자본주의 시대의 극대이익이 요구되는 시점에 전환되어 온 시대 효율성 논리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돼 왔다.
하지만 인간 본연의 자아에는 균형잡인 인간에 대한 욕구가 꿈틀거리면서 에워싸인 마음의 벽에 충돌이 일어난다. 경쟁을 통해 승자의 포식을 누리는 여유보다 존재의 평화를 누리길 원하고, 존재의 여유를 즐기기 원하고 너와 내가 바람과 태양과 별들과 어우러지는 조화속에서 살아왔던 역사속의 내 몸 안의 유전자를 잊어버리기엔 근대화 시간이 너무 짧지 않는가 싶다. 땅을 일구어 생명의 근본인 먹거리를 생산해 낸다는 게 생의 근본임을 존중해주는 것은 물론이고 그 농사 행위에 철학, 종교, 제도, 천문, 경제, 사상의 모든 형이적인 상학, 하학의 개념이 집약돼 녹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아무리 새가 높이 날더라도 결국은 나뭇가지에 앉을 수 밖에 없겠지만 어느덧 생각이 너무 멀리 날아가 버린 것 같다.
하지만 거품을 빼고 인색하게나 말할 수 있는 것은 농사가 단지 농사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인간의 참나를 되돌아 볼수 있는 계기가 될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아직도 안끝났소?”라는 소리에 방랑하던 이 생각 저 생각이 고랑 매던 밭에 사뿐히 내려앉는다. “여기와서 참매운탕에 소주 한잔 합시다” 다 먹을라고 한 짓거리니까… 웬 매운탕? 언제?
아마도 올라올데 준비해 온 것이 틀림없다. 어느새 개울가에서 솔솔~ 솔냄새와 함께 창공을 머리 뒤로 하고 나뭇가지에 앉아 절실히 벌레를 찾는 새처럼 현실적인 매운탕 냄새가 내 몸을 자극한다. 본능적으로 한걸음에 뛰어나가 옆고랑 고추 밭에 싱싱한 어린 파란 고추 몇개를 벌써 손에 훔치고 있다.
오 광 주
인치과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