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깊은 소관탈(상)
드디어 가까운 지인인 H교수와 소관탈 섬으로 밤낚시를 가기로 약속한 날이 되었다. 낚시일정만 잡혔다 하면 며칠 전부터 설레는 마음 때문에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심지어는 조용히 잠들었다가도 안방 천장에서 환영처럼 요동치는 찌의 신기루에 화들짝 놀라 비몽사몽 밤잠을 설치기 일쑤다. 출조 전날쯤 되면 반은 미친놈 형국이다. 별로 쓸데가 없는 낚시용품들까지 모조리 늘어놓고 이상한 열병식을 거행한다.
그냥 사용해도 될 깨끗한 낚싯대를 괜스레 닦아대다가 무심코 벽에 들이꽂아 값비싼 카본 호사끼를 잡아먹고 혼자서 벙어리 냉가슴을 앓곤 한다. 아마도 낚시 매니아가 아니라면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비정상적인 사건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보통 때에는 좋은 물건이나 패션에도 관심이 없고 백화점에도 잘 가지 않지만 유독 낚시용품만은 모조리 최고급 명품들이다. 온 집안에 시글시글 넘쳐나던 낚싯대나 알록달록 동글동글한 찌, 장구통 릴이나 스피닝 릴, 고어텍스로 된 모자와 낚시 옷, 갯바위용 장화 같은 허접때기들의 가격을 알아낸 아내는 하마터면 졸도할 뻔 했었다.
집구석 여기저기에서 쓰레기처럼 발에 걸리던 물건들이 모조리 일반인의 상식으론 전혀 생각하기 힘든 가격대였으니… .
오늘도 인천국제공항이 개항한 다음부터 국내선 전용으로 바뀐 김포공항에서 제주행 비행기 시간을 기다리며 단골 낚시점에 전화해서 현지기상을 알아보고 내 전용 낚싯배격인 ‘해광호’ 선장의 안부를 묻는다. 오늘밤에 시도할 먼 바다 야간낚시의 안전과 어획고를 좌우하는 두 중심축은 선장과 낚시 가이더이다.
늘 취중인 사람 좋은 해광호 선장은 말 소주를 마셔도 끄떡없다고 항상 큰소리치지만 높은 파도 속에서 암초에 밀착해 배를 붙여야하는 위험한 야간 선상낚시에 음주란 어림도 없는 일이다.
김포공항을 떠난 비행기는 순식간에 인천앞바다를 지나쳐 서해 안쪽으로 얌전하게 누워있는 안면도 상공을 가로지른다. 석양에 번쩍이는 머나먼 수평선이 그윽하다.
소관탈 낚시 때문에 하도 이 하늘 길을 많이 지나다녀 이제는 아무리 높은 상공에서도 웬만한 지형지물을 훤히 헤아릴 수 있다. 직선으로 쭉 뻗은 대호만 방조제에 연이어 조그만 섬을 축으로 바다를 그어버린 새만금 뚝 길이 발아래로 미끄러져 지나간다.
태초부터 형성된 거대한 자연의 모습을 기하학적으로 바꿔버린 인간의 저력에 다시금 경탄을 금할 수 없다. 산야를 꿰뚫은 도로와 질서정연한 농경지, 단순화된 해안선이 경이로운 아름다움을 발산한다.
점점이 낚싯배가 떠 있는 제주해협을 가로지르자 어느새 다가오는 화산섬 특유의 검은빛 해안과 삼나무에 둘러싸인 바둑판같은 밀감밭들이 정겹다.
급히 공항을 빠져나와 단골낚시점에 도착하자 여일하게 반기는 낚시가이더의 구릿빛얼굴이 듬직하다. 말하기 쉽게 가이더라고 부르긴 하지만 그는 먼 바다 낚시에서 우리의 안전과 조황을 좌지우지하는 야전사령관 격이다.
그러나 오늘밤엔 우리와 함께 출조하지 못하게 되었단다. 선약된 단체낚시 팀이 있어서 그들과 함께 바다에 나가야 한다며 양해를 구한다. 한편으로는 막연한 불안감이 앞섰지만 아직 아마추어인 H교수 앞에서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고 계획대로 야간낚시를 강행하기로 결심했다.
가이더는 오늘밤 소관탈에 파도높이 2m, 북서풍이 8~10m쯤 불 것으로 예측했다. 오끼나와 북쪽에서 다가오는 8호 태풍 때문에 내일 오후가 되면 소관탈 해역의 파고가 4m로 높아질 것이므로 어떤 일이 있더라도 오전 10시 안에 반드시 철수하도록 선장에게 지시한다. 적어도 제주근해에 관한 한 그의 예측이 빗나가는 법은 없었다.
앞서 제주에 도착한 H교수와 둘이서 짝을 이뤄 5톤급 FRP선인 해광호에 오른 시간이 오후 여섯시. 작지만 둘이서 편안하게 누울 수 있는 따뜻한 선실을 갖춘 해광호는 높은 파도와 세찬바람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주는 바다위의 한 점 아늑한 휴식처이자 보금자리다.
설레는 마음으로 1시간을 넘게 항해하여 해질녘에 소관탈에 다다랐다. 소관탈은 제주도 북서쪽 약 30Km 해상에 위치한 작고도 아름다운 암초 섬이다. 높이가 약 30m쯤에다 둘레가 200m나 될까 말까한 삼각팽이 모양의 외로운 바위덩어리여서 어디하나 발붙일 곳이 없다. 태풍이라도 부는 날에는 꼭대기까지 파도에 휩쓸려 순간적으로 잠겨버리곤 한단다.
일렁이는 파도를 헤치며 문안인사를 겸해서 한 바퀴 돌아본다. 다행히 다른 낚싯배는 한척도 없었다. 오늘은 우리가 소관탈 섬을 통째로 전세 낸 날이다. 오, 행운이여! 예감이 썩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