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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레이수필(835)>
오백원 짜리 도둑의 비밀
박상록 / 충북지부 학술이사

가장 당혹스러운 때는 나보다 먼저 누가 내 라이터를 주머니로 가져가며 ‘자, 이제 갑시다!’ 하며 일어서는 때다.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도둑맞을 때의 심경이란 참으로 씁쓸할 수밖에 없다. 난 아직도 담배를 피운다. 꼭 담배 맛이 좋아서도 아니요, 끊을 자신이 없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 나의 구차스런 변명의 시작이다. 법과 질서, 규범과 도덕의 틀에 순종하며 사는 삭막한 현대생활 속에서 누가 뭐래도 나만의 자유와 고뇌를 찾는 희열같은 것을 담배 연기 속에서 맛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나와 같은 애연가들은 동료의식(?)이 유달리 진하다. 담배를 권하고 불을 붙여주는 광경은 흔한 일이다. 특히 요즘처럼 금연운동이 거세지며, 상대적으로 애연가들이란 무식하고 냄새나고 나약한 소수집단으로 전락되어 버린 현실에선 더욱 그렇다. 담배를 태우는 사람을 보면 이 각박한 사회에서나마 함께 세상사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상대처럼 느껴지고 삶의 낭만을 아는 사람 같다는 생각도 든다. 새벽엔 조깅으로, 식사는 부족한 듯 싱겁게, 사무실엔 금연 표어를 붙이는 꽉 막히고 멋없는 결백주의자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러나 그러한 고고한 동료애(?)조차도 하루가 멀다 않고 없어지는 내 일회용 라이터를 생각하면 분노가 끓어올라 또 한 개비 입에 문다. 담뱃불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애연가는 없다. 주머니의 라이터가 갑자기 행방불명이라도 되면 궁금함을 떠나 초조해진다. 그때마다 더 생각나는 담배 맛에 라이터를 빌리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리게 될 때처럼 자신이 초라해 보일 때가 없다. 그래서 하루라도 더 그 라이터를 지키고자 안간힘을 쓰지만 그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다. 회식자리에서 라이터를 빌려달라면 직접 붙여주고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는 모습이 흔하다. 절도와 분실의 가능성을 사전에 없앤다는 속셈이다. 꼭 그렇게 노골적이진 않더라도 일단 빌려준 후 상위에 그 라이터가 놓이면 자신도 담배를 피우는 척하며 다시 슬그머니 주머니 속으로 챙기는 사람도 있다. 상당히 고급수법인 셈이다. 아예 자기 라이터는 없는 척 꺼내 놓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다. 가장 당혹스러운 때는 나보다 먼저 누가 내 라이터를 주머니로 가져가며 ‘자, 이제 갑시다!’ 하며 일어서는 때다.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도둑맞을 때의 심경이란 참으로 씁쓸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나는 꾀를 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쩌면 담뱃불과 관련된 나의 비밀은 이때부터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다름아니라 나 역시 비리의 주인공인 라이터 도둑이 되는 것이다. 기왕 내 라이터를 챙기지 못할 바에야 남의 것이라도 슬쩍 손에 쥐는 전략이었는데 제법 실속이 있었다. ‘서로 바꾸는 것인데...’ 하며 합리화시키기도 편하고 그리고 심지어는 여관 라이터까지 내 주머니에 들어올 때면 아내의 그 예리한 감각이 부담스럽기까지 하다. 그래도 집은 차라리 낫다. 비교적 점잖은 자리에서 무심코 건네준 라이터에 이상한 글자라도 보이면 여간 당혹스러운 게 아니다. 그래서 최근에 결심한 것은 필요에 따라 도둑이 될지언정 우량의 품질만 선택적으로 가로 채자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기어코 터지고 말았다. 며칠 전 담뱃불 빌려주지 않는다고 폭행까지 한 사건을 신문지상에서 접하게 된 것이다. 담뱃불을 빌려주지 않았다고 폭행까지 당하는 세상인데 나처럼 겁 없이 라이터를 가로채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어떤 신세가 될까 생각하노라니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그 무시무시한 가능성을 생각하여 소스라치게 놀라게 된 것이다. 비록 나만의 비밀이었지만 라이터 도둑질은 물론이거니와 자유니 고뇌니 구차스런 변명도 집어치우고 이 기회에 아예 담배조차 끊자는 생각이 그새 입에 문 담배연기를 타고 내 머리 속을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