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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중 칼럼] 애매에서 모호까지

명사시선

임철중 칼럼

<전 치협 대의원총회 의장>

애매에서 모호까지

  

점잖은 노신사가 택시를 탄다. “기사양반, ‘전설의 고향"으로 갑시다." 나이가 지긋한 기사는 잠시 멈칫 하더니 이내 빙긋이 웃으며 미터기를 누른다. 삼십분 뒤 손님이 내린 곳은 서초동 ‘예술의 전당" 앞이었다. 넌지시 운(韻)만 떼어도 대충 눈치로 때려잡는데, 귀신을 뺨치게 알아맞히는 솜씨, 이것도 한국인만의 남다른 재주다. 그래서 삼행시가 태어나고 유행한다. 그러나 이처럼 머리가 너무 잘 돌아가는 재주는 그 폐해 또한 만만하지가 않아서, 지레짐작과 넘겨짚기로 인한 실수나 오해 즉 ‘소통의 부재"라는 후유증을 남기는 일이 다반사다. 


필자를 포함하여 누구나 흔히 범하는 실수이기에 저자의 양해를 구하며, 치의신보에 실렸던 릴레이 수필 한 대목을 인용한다. “엄마들은 고까와 할 수가 없었는데"라는 문장을 보자. 정확하게는, “그렇게 고까와 할 수가 없었는데" 하거나 “할 수밖에 없었는데" 로 써야한다. “고깝다"는 말은 “야속한 느낌이 있다"는 뜻으로, ‘밖에" 나 ‘그렇게"가 들어가야 비로소 이중부정의 강조가 완성된다. ‘밖에"는 ‘오로지" 고까울 뿐이라는 강조요, ‘그렇게"는 고까운 정도를 나타내는 부사로서 ‘없다"와 만나서 ‘그럴 수 없을 만큼 매우" 고깝다는 뜻이 된다. 원문은 본의 아니게 정반대의 뜻이 되어버렸다. 바로 이 대목에서 많은 사람들이, “뭘 그렇게 시시콜콜 따지냐? 그냥 대충 넘어가." 한다. 애매모호를 넘어서 정반대인데도 말이다.  


프랑스 탐미파들의 ‘애매설"은, “말은 원래 모호한 것이므로 깊은 사상과 감정을 도저히 표현할 수 없다."는 주장이라고 한다. 한국인은 배우지 않아도 이정도 이론은 다(?) 안다. “내 가슴에 맺힌 한을 어찌 다 필설(筆舌)로 옮기리요?" 이건 드라마 마다 단골로 등장하는 멘트 아닌가? 하기야 다양한 인간의 더 다양한 생각을 극히 한정된 소통 기호인 ‘말"로 옮기기가 쉬울 리 없다. 더구나 ‘생각"이라는 괴물은 대화 또는 기록과정에서 슬그머니 변신하기도 한다. 마음에도 없는 말이 불쑥 튀어나와,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스스로 반문해본 적은 없는가?


번역이 어려운 이유는 언어의 ‘맛"을 빠뜨리는 ‘배달사고" 때문이다. 이에 비하여 대화는 말하는 이의 대뇌에서 혀끝까지, 그리고 듣는 이의 고막에서 대뇌에 이르기까지 배달사고 기회가 많고 시간에도 쫓겨서, 사고발생률은 더 높다. 결국 대뇌와 대뇌가 ‘직거래"하는 ‘수신호나 이심전심"의 몫이 커진다. 이러한 언어습관이 누적되고, ‘말의 교류"에 지켜야 할 교통법규와 신호등마저(어휘, 문법과 관습 등) 무시하면, 직거래는 지레짐작과 제멋대로 넘겨짚기의 ‘암거래" 수준으로 곤두박질한다.


“I ain"t got no money.”“나 돈 없어."의 뉴욕 할렘가(街)식 표현이다. “I do not have no money."로 풀어보면 거꾸로 돈이 있다는 말이 된다. 본시 ‘no" 대신 ‘any"가 들어가야 원칙이나 이 동네에서는 안 통한다. 오히려 money 앞에 no가 들어가서 두 번씩이나 ‘없다"를 강조한다는 셈법이다. 이는 곧 대화의 ‘격"이요 다시 사고(思考)의 격, 품성의 격으로 이어지는 것이니, 우리가 할렘가식 말과 글을 써서야 되겠는가? 거기에 모 전 대통령처럼 말꼬리를 두루뭉수리로 잘라먹거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역질문으로 얼버무리고, 젊은 층의 말투로 굳어버린 “인 것 같아요." 의 남발 등 나쁜 습관이 덧붙으면, 대화의 격이 떨어지고 소통은 막힌다. 태생이 애매한 ‘말"을 더욱 모호하게 만들지 말자. 배운 사람들이 앞장서서 적절한 어휘 고르기·문법 지키기·정확한 관용구 쓰기 등 우리말 바로잡기 운동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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